“금강… 이 강은 지도를 펴놓고 앉아 가만히 들여다보노라면, 물줄기가 중동께서 남북으로 납작하니 째져 가지고는(한강이나 영산강도 그렇기는 하지만) 그것이 아주 재미있게 벌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한번 비행기라도 타고 강줄기를 따라가면서 내려다보면 또한 그럼직할 것이다. (중략) 이렇게 에두르고 휘돌아 멀리 흘러온 물이, 마침내 황해 바다에다가 깨어진 꿈이고 무엇이고 탁류째 얼러 좌르르 쏟아져 버리면서 강은 다하고, 강이 다하는 남쪽 언덕으로 대처(大處) 하나가 올라앉았다. 이것이 군산이라는 항구요, 이야기는 예서부터 실마리가 풀린다.”
채만식은 소설‘탁류’의 배경이 되는 군산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군산근대역사박물관 1층 로비에는 실제로 그가‘그럼직할’것이라고 짐작한 군산 시가지의 모습이 걸려 있다. 1945년 9월 미군정이 촬영한 군산의 항공사진이다. 오른쪽 시가지는 반듯반듯하게 구획정리가 잘 돼 있다. ‘근대식 건물로든지, 사회시설이나 위생시설로든지, 제법 문화도시의 모습’을 갖춘 본정통 해안통이다. 그 외 지역은 조선사람들이 ‘어깨를 비비며 옴닥옴닥 모여 사는 곳’이다. 대비가 확연하다.
최근 군산시가 원도심 살리기 사업을 하면서 일제시대 외국인 거주지였던 이 일대가 젊은이들과 학생 가족단위 관광객에게 인기 있는 명소로 부활하고 있다. 비극적 역사의 현장을 돌아보며 교훈을 얻기 위한 여행, 일종의 다크투어리즘(Dark Tourism)이다.
군산의 어두운 과거로 떠나는 다크투어리즘
원도심 살리기 사업의 핵심은 도심 곳곳에 옛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일제강점기의 건축물을 관광자원화하는 것이다. 지금은 해망로인 본정통에 위치한 관공서 건물을 비롯해 구도심에는 아직도 1930년대에 지어진 170여 채의 살림집이 골격을 유지하고 있다.
투어는 군산항 바로 뒤편 근대역사박물관에서 시작한다. 박물관 오른편의 옛 군산세관 본관은 서양식 단층건물로 서울역사(驛舍) 한국은행 본관 등과 함께 국내에 현존하는 서양고전주의 3대 건축물로 꼽힌다. 외관은 벨기에에서 들여왔다는 붉은 벽돌이지만 내부는 목조로 지어졌다. 붉은 벽돌과 어우러진 3개의 첨탑이 이국적이다. 현재는 호남관세전시관으로 쓰인다. 금강과 만경강을 끼고 국내 최대의 쌀 생산지인 호남평야와 인접한 군산에는 개항이전부터 일본인들이 암암리에 들어와 있었고, 일제시대에는 미곡수탈의 전진기지였다. 군산세관 건물은 이 지역에선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이었다.
박물관 왼편으로 발길을 옮기면 적산가옥인 장미갤러리, 1930년대 상업시설인 미즈상사 건물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다. 적색 나무기둥과 창틀로 장식된 외관이 한눈에도 독특하게 보인다. 지금은 각각 갤러리와 카페로 운영되고 있다.
바로 옆에 단아함과 단순미가 돋보이는 하얀 단층 건물은 옛 일본 제18은행 군산지점이다. 일제가 쌀을 반출하고 토지를 강매하기 위해 1907년 개설한 은행으로 건물은 1914년에 지어졌다. 지금은 근대미술관으로 변신해 지역작가의 전시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옆에는 골격이 단단하고 웅장한 2층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일제 식민지배를 대표하는 국책 금융기관인 조선은행 건물이다. 1922년 준공됐다. 전주가 아니라 이곳에 자리잡은 것으로 보아 당시 군산의 경제적 위상을 가늠해 볼 수 있다. 높이로만 보면 3층은 족히 넘어 보이고 외관상으론 2층이지만 실제 안에 들어가 보면 단층건물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가운데를 툭 틔워 내부가 한층 시원하고 웅장하다. 지금은 근대건축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근대역사박물관에서 3,000원짜리 입장권을 구입하면 옛 군산세관, 18은행, 조선은행 건물 내부까지 모두 관람할 수 있다.
보고 찍고 즐기는 상품이 된 일제의 유적
해망로 건너편은 당시 일본인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지금의 신흥동 월명동 영화동 일대가 여기에 속한다. 행정구역상 여러 동으로 나뉘어져 있지만 실제로는 근대역사박물관에서 반경 1km 남짓으로 천천히 걸어도 20여분이면 충분히 닿을 수 있는 위치다. 강화도조약 후속조치로 군산에도 외국인들의 거주지인 조개지가 만들어졌는데, 일부 중국인을 제외하면 실제 거주 외국인의 90%이상이 일본인이었다. 일본양식의 건축물이 많을 수 밖에 없다.
그 중에서도 원형이 가장 잘 남아 있는 건물이 신흥동 일본식 가옥, 일명 히로쓰 가옥이다. 주인이 살지 않기 때문에 원도심에서 유일하게 관광객에 개방돼 있다. 군산에서 포목점과 농장을 운영하며 부를 쌓은 히로쓰가 건립한 2층 목조가옥이다. 큰 측백나무가 담장을 따라 둘러져 있어 밖에서는 건물이 왜소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저택에 가깝다. ‘ㄱ’자 모양으로 붙은 건물이 두 채다. 1층은 온돌방 부엌 식당 화장실이고, 2층에는 일식 다다미방이 있어 당시 일본인 지주의 생활양식을 엿볼 수 있다. 일본 특유의 아기자기한 정원도 볼만하다. 영화 ‘장군의 아들’과 ‘타짜’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히로쓰 가옥에서 5분 거리 월명산 자락에는 우리나라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일본식 사찰 동국사가 자리잡고 있다. 경사가 가파른 지붕, 촘촘한 창살에 단청 장식이 없는 대웅전은 흔히 보아온 우리 사찰과는 느낌이 많이 다르다. 웅장함보다는 정갈함이 묻어난다. 건물 뒤편의 대숲이 서늘하다. 앞마당에는“권력에 편승하여 가해자 입장에서 포교했던 조동종 해외전도의 과오를 진심으로 사죄”한다는 일본 조동종의 참사문을 새긴 비석이 세워져 있다.
동국사에서 월명로 방향으로 5분만 걸으면 새롭게 단장한 일본식 가옥을 여러 채 볼 수 있다. 다다미방과 게스트하우스 펜션 등으로 구성된 숙박시설 ‘고우당’이다. ‘곱다’의 전라도 사투리 ‘고우당께’에서 이름을 따왔단다. 고우당을 중심으로 역시 일본풍의 새로운 카페와 음식점도 여럿 들어서고 있다. 원도심 재생사업이 마무리 되었을 때 이 일대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박물관 방향으로 조금 올라오면 ‘8월의 크리스마스’ 촬영지로 유명한 초원사진관이다. 기념사진을 찍고 데이트를 즐기는 젊은이들의 발길이 꾸준하다. 조금 떨어진 이성당은 전국적으로 유명한 빵집이다. 평일 한낮에도 길게 줄을 서야 입장할 수 있을 정도다. 인근의 복성루도 전국3대 짬봉집으로 줄을 서서 먹을 정도고, 화교2세가 운영하는 빈해원도 빠지지 않는 군산의 맛 집이다.
‘기억되지 않는 역사는 반복된다’근대역사박물관에 크게 걸린 현수막이다. 일제의 잔재를 관광자원화하는 것에 대한 비판을 의식한 듯 보인다. 그러나 군산의 근대문화유적 곳곳에 붐비는 젊은이들의 표정에서 기우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그건 하나의 문화고 취향이고 상품이다. 채만식은 탁류에서 한 세기가 지나도 조선사람들이 ‘고만큼이나 문화다운 살림을 하게 되리라 싶지 않다’고 비관했지만, 지금 한국은 이미 그것쯤이야 보고 느끼고 찍고 즐기는 문화상품으로 소비할 만큼 성장했다. 어두운 역사가 남긴 근대문화유산은 더 이상 금강이 쏟아낸 군산의 흙탕물(濁流)이 아니라 새로 관광객의 발길을 끌어들이는 맑은 물(淸流)이 되고 있다.
군산=글,사진 최흥수기자 choissoo@hk.co.kr
뉴스 A/S
☞ 독자 분의 지적에 따라 끝에서 두번째 단락 마지막 문장의 '빈혜원'을 '빈해원'으로 수정(2014.07.30 21:46)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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