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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철 "대중에 봉사하고 싶지 않았다"

입력
2014.07.23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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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만의 앨범 노무현 대통령 서거에 큰 충격…대중에 한 말이 상처로 돌아와

록 음악 없는 록 가수 2박 4박 갖춘 대중음악은 다 록…난 아이돌 댄스가수 출신

언론에서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든 그는 직설과 독설의 대가였다. 건방진 말투와 불손한 몸짓으로 질의에 답하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딴판이었다. 말 한 마디, 문장 하나에 겸손이 배어 있었다. 하지만 그 말 속엔 날이 숨어 있었다. 갖은 비유와 논리로 말을 길게 이어갔다. 의관을 정제한 선비가 공손한 언어로 사회부조리를 조목조목 비판하는 듯했다.

교주로 불리고, 마왕이라 호칭되는 신해철이 음악으로 다시 돌아왔다. 2008년 넥스트6집 발매 이후 6년만이다. 새 음반의 이름은 ‘리부트 마이셀프’. 2집 ‘마이셀프’(1991)를 연상시키는 제목이다. 초심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는 의지로 읽힌다. 달랑 4곡이 실린 이 미니앨범에서 신해철은 또 한번 음악적 실험을 감행했다. 반주와 노래, 코러스를 혼자서 다해낸 1인 아카펠라곡 ‘A.D.D.A(아따)’는 1,000번 이상 녹음한 뒤 그 중 150개를 골라 합쳤다. 매번 새 영역에 도전해온 신해철답다.

신해철이 서울 남대문로 한국일보를 찾아 문화부 기자들과 마주 앉았다. 6년 동안 음악을 쉰 사연을 비롯해 음악과 인생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넓고 길게 풀어냈다.

신해철은 "문단 데뷔할 때 사랑에 대한 시와 예쁜 수필을 써서 소녀 팬들의 지지를 받았는데 나중에 800쪽짜리 책도 쓰고 논문도 쓰는 작가로 변신한 꼴"이라고 자신의 음악 인생에 대해 말했다. "사람들 눈에 시답지 않고 그들이 피곤하게 느낄 만도 했을 것"이라고 되돌아보기도 했다. 신상순 선임기자 ssshin@hk.co.kr
신해철은 "문단 데뷔할 때 사랑에 대한 시와 예쁜 수필을 써서 소녀 팬들의 지지를 받았는데 나중에 800쪽짜리 책도 쓰고 논문도 쓰는 작가로 변신한 꼴"이라고 자신의 음악 인생에 대해 말했다. "사람들 눈에 시답지 않고 그들이 피곤하게 느낄 만도 했을 것"이라고 되돌아보기도 했다. 신상순 선임기자 ssshin@hk.co.kr

_6년만의 앨범이다. 음악 활동을 오래 쉰 것을 두고 고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과 관련 짓는 사람이 있다.

“여러 일이 겹쳤다. 노무현 대통령 서거를 안타까워했던 것도 사실이고 그 후 2, 3년 정도 타의에 의해 방송을 쉬어야 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어떻게 시작한 음악인데 그 일 하나로 6년이나 음악을 접겠는가.”

_그럼 다른 일이 있었는가.

“최근 3년 정도 건강이 안 좋았다. 간과 쓸개가 나빠 수술을 했다(신해철은 2012년 담낭염 수술로 간의 절반을 떼내고 쓸개는 아예 적출했다). 친구들에게서 ‘쓸개 빠진’이란 말을 들었다(웃음). 몸이 안 좋아 재충전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내가 후배들한테 했던 말이 ‘너네 집 얼마나 잘 사는지 모르겠는데, 수도꼭지 돌리면 바로 뜨거운 물 콸콸 나오니?’였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잘난 척은 다 해 놓고 정작 내가 제대로 충전을 하지 못한 것 같았다. 음악을 잘한다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재충전 작업은 정말 열심히 했다고 믿었는데 교만이었다.”

_재충전만을 위한 시간으로는 너무 긴 공백이었다.

“대중음악은 대중이 주인이기 때문에 대중에 대한 봉사정신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주인을 흉보고 욕해도 봉사는 해야 한다고 여겼다. 나 스스로도 봉사는 할 만큼 했다고 믿으며 3년을 쉬었다. 그 뒤 여러 가지를 반성하며 나 자신을 생각했다. 결국 ‘나는 사람을 좋아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어렸을 때 엄마 친구들이 집에 오면 ‘나 노래하겠다고 그래’라며 엄마 옆구리를 찌른 적이 있다. 어떻게든 사람들 앞에 서고 싶었다. 물론 대중을 신뢰하는 것과 대중을 사랑하는 것은 다른 얘기다. 5년쯤 쉬니 ‘웃기지 마라. 나는 제대로 봉사한 적이 없다. 제대로 된 봉사를 했다고 얘기하려면 앞으로 30년 정도는 더 필요하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_대중에 대한 ‘봉사’를 그만두겠다는 것이었나.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무엇인가.

“어느 순간부터 하지도 않은 말을 한 것으로 미디어에 나왔다. 정글에서 쫓기는 사냥감이 됐다고나 할까. 괴짜 취급 당하거나 인간성이 덜 된 사람으로 여겨지는 것은 괜찮다. 사실이 그러니까. 갑갑한 세상에 재미있는 캐릭터로 이용돼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하지 않은 말로 비난받는 상황이 왔다. 학원 광고에 출연했더니 사교육에 반대해온 신해철이 말을 뒤집었다고 했다. 난 공교육 절멸론자다. 사교육의 비용과 형태는 반대했어도 사교육 자체를 반대하진 않았다. 누군가가 내가 미워 문장을 고의로 비튼 것이지만 대다수는 나처럼 기만당한 거라 생각했다. 대중을 설득할 재주가 없는 나를 탓하든가, 아니면 닥치고 음악만 하든가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_대중에 대한 실망이 컸다면 돌아오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영화 ‘반지의 제왕’의) 골룸 덕분이다. 쉬는 동안 골룸처럼 지냈다. (마음 속에서) ‘끝까지 (대중을) 미워해야 해’와 ‘노래를 불러야 해’라는 생각이 돌아가면서 내게 말을 했다.”

_이번 음반에 어떤 ‘봉사’의 의미를 담았나.

“내 앨범 중 악명 높은 것들이 있다. ‘모노크롬’이나 ‘비트겐슈타인’ 같은 앨범은 그 당시 (음악적) 기술을 실험하기 위해 만든 곡들로 채웠다. 배하고 배꼽이 바뀐 노래들이었다. 대중이 상당히 피곤했을 거다. 지금은 ‘신해철은 유행가를 만드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3분40초가 기준이 되는 대중음악 시장에서 다른 사람처럼 똑같이 유행가를 만들려 한다. 나는 공방에 홀로 앉아 수작업으로 소량 생산하는 그런 제품을 유지하려 한다. ‘가내수공업이건 공장대량생산이건 구두를 만드는 사람’이라는 건 같다. 내가 만든 구두에 엄청 많은 개념과 디자인을 담고 싶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신는 사람의 발이 편하느냐는 거다. 난 그 동안 ‘한국 사람은 항상 멜로디만 듣고 사운드는 듣지 않는다’고 불평했다. 지금은 뮤지션의 임무가 좋은 멜로디를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운드의 개발은 알아주는 사람이 있으면 기쁜 일 정도로 생각한다.”

_궁극적으로 발이 편한 신발 같은 곡을 만들겠다는 건가.

“축구팀에 비유하자면 나는 공격형 미드필더다. 골은 가끔 넣었지만 연차가 쌓이니까 득점이 꽤 된다. 그래서 공격수 임무를 부여 받기도 한다. 하지만 나 자신을 공격수 즉 가수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가수라는 전문직은 타고난 재능과 기술 없이는 불가능하다. 공격형 미드필더는 팀이 밀리면 수비도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 나를 베테랑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수줍은 표정을 지으며 ‘아직 멀었어요’ 따위로 답하기보다 ‘맞다. 25년 했으니까 내가 도움이 되는 영역을 찾아보자’라고 해야 한다. 그게 내가 (대중에게) 할 수 있는 봉사다. 프로듀서로서 아이돌 음반이나 화려한 음악을 만들 수 있게끔 감각을 유지하고 또래 뮤지션들이 도움을 청하면 일손을 거들어야 한다.”

_록 음악을 한다면서 이번 음반엔 록이 하나도 없다.

“무슨 소리? 수록곡 모두 록이다. 마돈나를 인터넷에서 검색해봐라. ‘록-팝-일렉트로니카’ 순으로 카테고리가 분류된다. 인터넷 분류로만 따지면 현재 활동하고 있는 전 세계 가수 중 90%가 록 가수다. 이제 록은 2박과 4박의 비트가 가해지고 동적인 움직임을 다루는 모든 종류의 대중음악을 총칭하게 됐다.”

_그런 의미의 록을 말하려 한 게 아닌데.

“때려 부수는 거 왜 안 했냐, 그런 뜻인지 안다. 나는 ‘내가 언제 제대로 된 록 뮤지션이었던 적이 있었나’ 하는 생각을 한다. 나는 아이돌 댄스 가수 출신이다. 한국일보가 한 때 내 춤을 ‘허리춤’이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나의 팬은 끝없는 분열과 내부암투 속에 놓여 있었다. 록을 좋아하는 팬들은 (발라드)‘슬픈 표정 하지 말아요’ 같은 쓰레기 시절에서 나를 구해줬다고 말한다. ‘내 마음 깊은 곳에 너’를 듣고 눈물 흘렸던 소녀들이 ‘우리 오빠가 요즘 하는 저 미친 짓만 아니면 내가 계속 예뻐해 주겠는데’라고 한다. 그게 내가 해왔던 대중음악이다. 솔직히 말해서 음악적으로 누가 신해철에게 ‘4대째 내려오는 (전통)국숫집’을 원하나. 나는 그냥 잡탕으로 여러 음식을 내놓는 분식집을 운영하는 식이다. ‘오늘은 깍두기 스파게티를 만들었어요’라고 말하는 한심한 모습이 내 정체성이다. 어쩌겠나(웃음).”

신해철은 故노무현 대통령의 팬으로도 유명하다. 신해철(오른쪽)이 2002년 대선 당시 노무현 대통령후보자의 찬조연설을 한 뒤 손을 맞잡고 인사하고 있다. 손용석기자
신해철은 故노무현 대통령의 팬으로도 유명하다. 신해철(오른쪽)이 2002년 대선 당시 노무현 대통령후보자의 찬조연설을 한 뒤 손을 맞잡고 인사하고 있다. 손용석기자

신해철은 사회 운동가의 이미지가 강하다. 정치 성향을 감추지 않고 사회적 발언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대중음악인으로는 드물게 노무현 전 대통령을 공개 지지했고 노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나자 추모 무대에 올라 눈물을 흘렸다. 이 같은 그의 행동과 발언이 음악적 성취를 가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최근에는 케이블TV오디션 프로그램 출연자에 대한 논란에도 끼어들었다. 오디션 출연자에게 ‘일진’ 출신이라는 비난이 쏟아지자 그는 트위터에 ‘품행 방정한 래퍼라는 말은 들어본 적도 없다. 있다 한들 그런 걸 어디다 쓰느냐. 방송국이 학생주임도 해줘야 돼?’라고 일갈했다. 이에 비판이 이어지자 그는 또 지지 않고 반박의 글을 올렸다.

_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은데.

“사회적 발언을 하거나 정치 이야기를 하는 게 다 음악이라고 생각한다. 정치와 사회와 음악이 상관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음악이 이상해진다.”

_파장이 두렵지는 않나.

“안 두려운 사람이 어디 있겠나. 선의로 이야기 해도 반사돼 돌아오는 증오의 양이 너무 크더라. 하지만 그 때문에 가수 생명이 끝날지 모른다는 공포는 갖고 있지 않다. 물론 가족이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은 있다. (사회적 발언이) 음악 활동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은 20대 때 충분히 고민했다. 가수가 ‘저는 말 잘 못하고요, 그런 건 잘 모르겠고요’ 하면서 음악에만 집중할 때 대중이 예뻐한다는 사실도 안다. 그런데 사회적 발언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연예인으로서 생명이 안전할 것이라는 보장 또한 없다. 설사 그런 보장이 있다 한들 모든걸 내려놓으면 스스로 너무 초라하게 느껴져서 음악이 제대로 될 리가 없다.”

_’일진 발언’도 그 연장선상인가.

“이제 말썽 안 부리기로 매니저들과 약속했는데(웃음). 일단 내 성격이 집단과 개인이 다투는 구도에서는 즉각적으로 반응한다. 더구나 이 일은 사실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여론재판 하듯 몰아가는 것은 나쁘다.”

_’일진 발언’은 피해자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조심스러운 부분도 있다.

“나는 기본적으로 학원폭력은 원 스트라이크 아웃제가 옳다고 믿는다. 한 번에 퇴학시켜야 한다. 하지만 이런 식의 여론재판은 모두에게 안 좋은 결과만 가져온다. 만약 실제 일진이었다 하더라도 그건 일차적으로 학교와 부모가 교육해야 할 일이다. 방송사는 정말 텔레비전에 나오면 안 될 정도의 범죄자라는 판단이 서면 그때 제재를 가하면 된다. 또 이런 형식은 교육적으로도 옳지 않다. 누군가의 인생길이 열리려고 할 때, 그러니까 상대방이 가장 취약한 시점에 발목을 잡는 건 내가 봤을 때 피해자의 커리어에도 좋지 않다.”

신해철은 1988년 MBC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차지한 그룹 무한궤도의 보컬로 가요계에 발을 디뎠다. 그가 26년 동안 가수로 지내는 사이에 가요제 무대에 함께 올랐던 친구들은 변호사, 박사, 의사가 됐다. 친구들은 2년 전 모임에서 그에게 “너도 ‘사’자 돌림이잖아, 악사”라며 농을 걸었다. 신해철은 이렇게 답했다고 했다. “야, 악사가 제일 어려운 사야. 무슨 자격증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무한궤도 시절의 신해철. (오른쪽에서 두번째)
무한궤도 시절의 신해철. (오른쪽에서 두번째)

_무한궤도 멤버 중 유일하게 넥타이를 안 매는 직업을 유지하고 있다. 당시 멤버들이 부러워하지 않나.

“아무래도 스스로 좋아서 음악을 했던 사람들이다 보니 여전히 내 활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하지만 부러워한다기보단 혼자 남아서 음악하고 있는 것에 대해 걱정을 많이 해준다는 표현이 맞는 것 같다. 후배들 하고 술 마실 때 끼워 달라고도 한다(웃음). 진짜로 한 번 술자리에 불렀더니 키보드 치던 조현문은 엠씨더맥스 이수와 신디사이저를 소재로 3시간이나 따로 얘기하더라. 다들 좀 고지식한 면이 있다.”

_가수가 되지 않았다면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

“대학가요제 나가기 이틀 전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음악을 포기할 생각을 했다. 엄마가 계속 고생하는 걸 볼 자신이 없었다. 대상을 받은 뒤 하늘로 날아갈 것 같았지만 정작 음반을 만들어주겠다는 사람은 없더라. 그게 인생이다. 그때는 무슨 일이든 직업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고교 때 정한 직업의 우선 순위가 음악을 하면서 먹고 살거나 음악 엔지니어 또는 프로듀서가 되겠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아니면 DJ가 돼 남이 만든 음악을 여러 사람에게 소개하거나 쇼 비즈니스 계통에 들어가고 싶었다. 어떻게든 음악으로 갈 수 있는 우회로를 찾았을 것이다. 아예 음악 일을 못했다면…요리사가 됐으면 행복했을 거다. 집에서 한식 요리는 내가 다 한다.”

_초창기 노래를 다시 들으면 어떤 기분이 드나.

“죽고 싶어진다. 옛날 노래로 갈수록 더 그런 기분이 든다. 영화로 치면 내가 감독인데 이런 구도에 이런 색깔이 나왔으면 좋겠다 식으로 영화를 만든 시기가 아니었다. 카메라 초점이 맞지 않아 주인공 모습이 흐리게 나오는 그런 기술적인 문제를 지닌 때였다.”

_참 달변이다. 비결이 있나.

“믿기 어렵겠지만 난 말수가 적은 내성적인 아이였다. 초등학교 때 책 읽는 거 말고 취미가 없었다. 초등학교 3학년 담임 선생님이 1년 동안 토론수업을 진행하며 자기 의견을 정확하게 말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 분 지도로 클라리넷을 배웠다. 4학년 올라갈 때 토론도 잘하고 음악도 잘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런데 4학년 때는 선생님이 음치여서 인지 음악 수업을 한번도 안 했다. 그 때부터 고교 3학년 때까지 내가 음치인줄 알고 지냈다(웃음).”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김지은기자 luna@hk.co.kr 강은영기자 kiss@hk.co.kr 황수현기자 sooh@hk.co.kr 박주희기자 jxp938@hk.co.kr 이창목 인턴기자(가톨릭대 생명과학과 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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