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정부가 기업들에게 투자 좀 늘리라고 사정이지만 외환위기 전야인 1995년엔 상황이 반대였다. 기업들의 투자 의욕이 하늘을 찔렀다. 삼성전자가 반도체 호황을 딛고 국내 기업 최초로 상반기 순이익 1조원 시대를 열었고, 그 해 수출 증가율은 25.1%로 세계 최고였다. 조선, 철강, 유화 등 대부분 중공업에서 ‘단군 이래 최대의 호황’을 구가했다. 미래도 온통 무지갯빛이었다. 중국을 비롯한 거대 신흥시장이 곳곳에 새로 열리는 중이었다. 이익이 폭증한데다, 외환자유화로 해외자금까지 풍부하니 기업들로선 ‘실탄’도 두둑한 셈이었다.
▦ 삼성이 자동차 사업에 들어갔고, 기아가 시설확장과 특수강 사업 진출을 선언했다. 한보의 당진제철소 설비투자도 막대했다. 재정경제원이 1월부터 부랴부랴 파악한 30대 그룹 설비투자 예정액은 30조원에 달했다. 전년 대비 증가율 60%에 이르는 아찔한 수준이었다. 설비 수입 급증으로 경상수지 악화 우려도 높아졌다. 급기야 정부는 사회간접자본(SOC) 투자 예산 집행 유보, 기업에 대한 투자 자제 요청, 대출 축소 등 전반적 긴축을 시도했다.
▦ 하지만 업계의 반발이 거셌다. 정부가 ‘돈줄’을 죄자 연초 10%였던 콜금리는 1월말 25%까지 치솟았다. 3년물 회사채 수익률도 15%대로 앙등했다. 기업 쪽에서는 정부가 경기를 관리한다며 모처럼 만의 성장기회를 무산시키려 한다는 불만이 들끓었다. 고 최종현 당시 전경련 회장은 “무슨 총수요 관리라고 하는데 그런 건 케인즈 시절에나 썼던 경제학”이라며 홍재형 당시 경제부총리의 ‘총수요 관리론’을 공박하기도 했다. 결국 지방선거를 앞두고 주가가 급락하고 시중금리가 급등하자 정부는 슬그머니 긴축기조를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된다.
▦ 최경환 경제부총리가 어제 경제 5단체장과 만나 기업의 적극적 투자와 일자리 창출을 호소했다. 하지만 재계는 사내유보금 과세 등을 거론하며 정부의 투자 호소에 탐탁치 않은 반응을 보였다는 후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전망만 있다면 아무리 말려도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고 투자에 나서는 게 기업의 생리다. 하지만 요즘처럼 경제 불확실성이 클 때는 10대 그룹에만 477조원이라는 막대한 사내유보금이 쌓여 있어도 선뜻 투자에 나서기 어렵다. 국면을 바꿀 투자 모멘텀이 등장하길 기대해 본다.
장인철 논설위원 icjang@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