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파주 출판단지에 ‘지혜의 숲’이라는 도서관이 만들어졌다. 365일 24시간 개방이라는 새로운 방식인데, 숲이라는 표현답게 서고도 높다. 책장 높은 곳에는 손이 닿지 않으니 열람이 어렵다는 지적이 있기도 하지만 집안에서도 주로 보관용 책들은 책장 높은 곳에 두는 것처럼 자주 읽는 책은 눈높이에 배치하고 손이 닿지 않는 곳에는 중복되는 책이나 잘 열람되지 않는 책들, 출판사의 재고용 책들이 배치된다면 효율과 심미를 모두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도서관에 입장하게 되면 먼저 사진부터 찍고 싶은 마음이 생길 만큼 아름답다. 8㎙ 높이의 거대한 책장으로 빽빽하게 채운 세상은 책의 존재감을 느끼는 진풍경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 나무책장이 뿜어내는 숲 냄새, 새 책에서 나는 잉크 냄새, 오래된 책들이 풍기는 옛 추억의 냄새, 책을 열어보지 않고 눈으로만 훑어도 사각사각 책장 넘기는 소리가 진동을 한다. 향 싼 종이에는 향냄새가 난다고, 책에서는 지혜의 냄새가 가득한 느낌이다.
때마침 아는 지인이 집안 청소 중이라며 여러 개의 사진을 올려주었다. 글 쓰는 분답게 집안이 온통 서재이다. 거실뿐 아니라 침실, 심지어 부엌 싱크대 옆과 베란다 창까지 책장이 놓여있다. 집안의 벽이란 벽은 모두 이중 삼중 책장으로 되어 있는 셈이다. 농담 삼아 아래층에서 알면 무너질까 봐 걱정하겠다고 하니 파안대소한다. 가득한 책이 그의 지식의 창고라 생각하니 부러움으로 그의 책장에 눈길이 간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의 책이 어떤 책이냐 보다 책이 놓여 있는 모습 자체가 무척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은 세로로 꽂혀 있으면서 가끔씩 가로로도 누워있고 때로는 하나의 책이 다른 책들을 차례로 쓰러지게 하여 마치 도미노처럼 원을 이루고 있었다. 하나하나의 책은 점과 같고 그 책들이 이루는 수평과 수직의 높고 낮고 넓고 좁은 선, 그리고 책들이 군집되어 이루는 면을 보니 조형의 기본요소들이 모두 드러난 작품인 듯하다.
옛 선비들도 그래서 더욱 책가도(冊架圖)를 사랑했나 보다. 책가도는 때론 책을 읽지 못해도 눈이 그림에 머물게 하여 책을 가슴에 아름답게 담는 그림이었다. 특히 정조는 어좌 뒤에 왕권을 상징하는 일월오봉도(一月五峰圖)가 아닌 책가도를 놓을 만큼 좋아했고, 학문으로 세상을 다스리겠다는 의지를 표현하기도 하였는데, 이런 책가도는 책을 귀한 가치로 삼는다는 내용만이 아니라 형식에서도 아름다운 조형의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었다.
최근 이런 책가도가 주는 따스한 정경을 느끼게 하는 작품을 보았는데, 바로 최인선 작가의 ‘미술관 실내와 그의 책장’이라는 작품이다. 작가가 직접 자신의 책장을 모티브로 그린 이 작품은 친숙하면서도 꿈꾸는 듯한 신비함을 준다. 책장의 책들이 빽빽하게 놓여 있는 모습이 ‘보이는 세계’라면, 공간과 공간 사이에는 마치 인상파의 붓질 같은 의외의 추상적 면들이 있는데, 이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드러낸다.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의 공존, 분명 실내의 책장을 그렸지만 책장 너머의 꿈꾸는 공간을 동시에 관조하게 하는 그림이다.
또 다른 느낌을 주는 책 그림은 홍경택 작가의 ‘서재’라는 작품이다. 책들을 갖고 화려한 색채와 기하학적 배치를 통해 비일상의 오묘한 분위기를 이끄는데, 운율이 느껴지는 반복과 변화의 패턴, 책들의 오밀조밀한 컬러구성이 아찔한 시각적 경험을 이끌며 책의 환영을 보게 하는 작품이다. 최인선 작가도 홍경택 작가도 모두 이런 책을 소재로 그렸지만 단순한 사물로서의 책이 아닌 책을 통해 추억, 꿈, 사랑, 이상을 담고 있다.
사실이든 그림 속이든 책이 주는 풍경은 참 아름답다. 숙독하지 않고 둘러만 봐도 좋다. 그 공간에 있기만 해도 행복하다. 국립중앙박물관의 도서관은 우리 옛 그림들과 함께 있는 공간이어서 그 오래된 시간이 피부에 와 닿는 듯 고즈넉함에 좋다. 지혜의 숲 도서관은 산책을 하다 우연히 만나는 책의 만남으로, 커피 향 즐기며 편안하게 볼 수 있어 기쁘다. 책 도서관이 다양한 콘셉으로 많이 만들어지면 좋겠다. 도서관은 크든 작든 존재만으로도 우리 삶의 아름다운 풍경을 만든다.
안진의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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