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사 장기화 가능성 커지자 국제사회 비난 피하려는 속셈
美 "반군 도청 자료는 진짜" EU, 러 경제제재 수위 강화 움직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말레이시아항공 MH17편 블랙박스 회수를 돕기로 약속하는 등 사고원인 규명에 협력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번 참사가 정치적 목적에 이용되는 것에 반대한다고 공언해 사건 실체 규명을 놓고 서방과 날 선 대립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서방국들은 추가 경제제재 으름장을 놓고 있으나, 벌써부터 대러 경제협력 수준에 따라 미묘한 입장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네덜란드 공보처(RVD)는 20일 푸틴 대통령이 마르크 뤼테 네덜란드 총리와의 통화에서 블랙박스 처리와 관련, 이같이 약속했다고 전했다. RVD 대변인은 “사고 현장의 자유로운 출입 보장과 시신을 실은 열차와 블랙박스를 넘기는 문제 등 현실적인 문제를 중점 논의했다”며 “푸틴 대통령은 모든 협조를 다하겠다고 약속했다”고 설명했다. 현재 여객기 사고 현장은 친러시아 성향의 우크라이나 분리주의 반군이 장악하고 있으며 푸틴 대통령은 반군 세력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인물로 꼽힌다. 친러 반군들도 “블랙박스를 국제조사단에 넘길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항공기 사고 특성상 조사 과정이 장기화할 가능성이 높은 만큼 푸틴 대통령이 사건 조사를 국제 전문가단에 미루는 방법으로 시간을 벌면서 국제적 비난을 피해 나가려는 물타기 전략을 펴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실제로 푸틴 대통령은 전날의 협조적 발언과 달리, 21일에는 크렘린궁 사이트를 통해 내놓은 사건 관련 담화에서 “누구도 이번 참사를 사리사욕을 위한 정치적 목적 달성에 이용하려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격추사건 배후로 러시아를 지목한 미국과 유럽연합(EU) 국가들의 대러 압박 수위도 높아지고 있다. 우크라이나 주재 미국 대사관은 성명에서 “우크라이나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도청자료를 정보기관 분석가가 감정한 결과 이 대화들은 진짜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말했다. 이런 점 등을 근거로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은 이날 미 CBS방송에 출연해 “그 동안 (대 러시아 제재를) 좀 주저했던 유럽 국가들이 이번 경고 신호를 인정하고 미국이 주도하는 제재에 합류해준다면 엄청난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와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은 전화 회의에서 러시아에 대한 EU의 접근방식을 재고하기로 합의했다고 영국 총리실이 전했다. 러시아 인사들에 대한 비자발급을 중단하고 자산을 동결하던 수위를 넘어 한층 강도 높은 제재안을 고려할 수도 있음을 시사한 것이다.
그러나 주요 3국의 온도차이도 감지되기 시작했다. 파이낸셜타임스에 따르면 영국은 “러시아에 좀 더 강한 태도를 보여야 할 것”이라고 주문했지만, 12억유로(1조6,660억원) 규모의 전투함 인도계약을 맺은 프랑스는 제재 수위를 높이는 데 소극적이다. 대러 가스 의존도가 높은 독일도 “푸틴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정부와 대화하도록 노력하고 있다”며 제재보다는 대화에 무게를 두고 있다. 이에 따라 22일 열리는 EU 외무장관 회의에서 러시아 국영 가스회사 가즈프롬이 제재 대상에 포함될지 여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유럽과는 별도로 피격사건과 관련한 규탄 결의안 채택을 추진 중이다. 유엔 안보리 15개 이사국은 결의안 초안을 회람하고 있고 이르면 21일 회의에서 결의안을 표결에 부칠 것으로 전해졌다.
한편 반군에 따르면 21일 현재 여객기 탑승객 298명 가운데 251구의 시신이 수습됐으며, 네덜란드가 파견한 법의학 전문가들이 도착한 걸 계기로 신원확인 작업도 본격화하고 있다. 배성재기자 passi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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