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군대의 격돌에서 국가간 격돌로…역사는 '대전쟁'으로 기억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군대의 격돌에서 국가간 격돌로…역사는 '대전쟁'으로 기억

입력
2014.07.21 11:27
0 0

※새 화요기획 ‘전쟁으로 읽는 세계사’의 첫 테마는 제1차 세계대전입니다. 유럽현대사를 전공한 류한수 상명대 교수가 네 차례 연재합니다.

1914년부터 4년간 대포-기관총 빗발쳐 군 850만명 전사-민간인 1000만명 사망 민간인 피해가 더 큰 '현대전'의 역설 시작

100년 전에 오스트리아 제국에 억누를 길 없는 분노를 품은 세르비아의 열혈 민족주의자 청년이 방아쇠를 당겨 오스트리아 황위 계승자를 죽였다. 이 사건이 도화선이 돼 유럽의 대열강이 빠짐없이 뛰어들면서 1914년 7월 28일 시작된 제1차 세계대전은 1918년 11월까지 지속됐다. 이 전쟁의 또 다른 이름은 ‘대전쟁’(the Great War)이다. 규모만 따진다면 제2차 세계대전이 그런 명칭을 얻기에 더 어울린다. 하지만 역사는 1차 대전을 ‘대전쟁’으로 기억하고 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가스 마스크를 쓴 채 기관총을 쏘고 있는 독일군들의 모습.
1차 세계대전 당시 가스 마스크를 쓴 채 기관총을 쏘고 있는 독일군들의 모습.

장기총력전의 서막 1차 대전

왜 그럴까. 핵 주먹에도 쓰러지지 않던 대단한 맷집을 가진 권투 선수가 예상하지 못한 상태에서 느닷없이 날아온 카운터펀치에 푹 쓰러지는 상황을 생각하면 된다. 1914년의 유럽에는 2차 대전처럼 사반세기 전에 끔찍한 전쟁을 겪은 기억이 없었다. 1차 대전에 비할 만한 규모의 전쟁은 19세기 초에 벌어진 나폴레옹 전쟁이었다. 1815년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이 몰락한 뒤 100년 동안 평화를 한껏 누리던 유럽에 느닷없이 찾아온 1차 대전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충격이었다. 네 해 동안 동원된 군인이 6,500만명, 전사한 군인은 850만명이다. 1차 대전은 말 그대로 대전쟁이었다.

스스로를 1차 대전 교전국의 지도자라고 가정해보자. 이런 천문학적 규모의 전쟁 수행은 헤라클레스가 거쳐야 했던 열 두 가지 사역의 어려움을 훌쩍 넘어선다. 우선 젊은 사내 수백만 명을 동원해야 한다. 그러려면 징집연령대 남성이 어느 곳에 몇 명이나 있는지 꿰고 있어야 하니 고도의 행정력이 있어야 한다. 전투가 귀족의 특권이던 시절에야 전사가 자기 돈으로 무장하고 전쟁터에 나갔지만, 근대국가는 국가의 재산으로 병사를 무장시켜야 한다. 수백만 명에게 지급해야 할 식량, 군복, 군화, 소총의 양이 태산을 이룰 만하고, 이를 감당하려면 엄청난 생산력을 갖춰야 한다.

대군을 싸움터로 옮기는 일도 만만치 않다. 수백만 병력과 수천만 톤의 물자를 신속하게 이송하려면 정교한 철도망을 건설하고 효율적으로 유지할 고도의 과학기술이 있어야 한다. 1차 대전은 군대와 군대의 격돌이 아니라 국가와 국가의 격돌이라는 성격을 띠었다.

프랑스 대혁명의 산물인 국민국가가 기틀을 잡기 전에는 중앙 권력이 활용할 수 있는 재원이 무척 한정돼 있어서 막대한 병력과 물자가 소모되는 장기전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더구나 봉건적 신분제를 벗어나지 못한 국가의 권력자는 백성을 동원할 수 없었다. 외국 군대와 싸우라고 피지배계급 젊은이의 손에 총칼을 쥐어주는 순간 그 칼끝과 총구가 외적을 향할지 자기를 향할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인구 4억 대국 청나라가 아편전쟁에서 한줌밖에 안 되는 영국과 프랑스의 원정함대에 무릎을 꿇은 까닭은 서양 함포의 위력에 질려서가 아니라 신분사회의 한계 탓에 백성 전체를 동원해 싸울 수 없어서였다.

국가가 국민 전체를 전쟁에 동원할 수 있으려면 국민이 국가를 사랑해야 한다. 적어도 미워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려면 국가가 혜택을 주는 존재여야 한다. 아니면 혜택을 줄 거라는 기대라도 불러일으켜야 한다.

프랑스대혁명이 전쟁에 국민동원 가능성 열어

자기의 이익을 보장(한다고 주장)하는 국가에 사랑하는 마음을 품은 국민을 믿고 권력자가 국민을 동원해서 적국과 싸우는 역사적 사건이 1793년 프랑스에서 일어났다. 루이 16세의 목을 자른 대혁명의 목을 죄려고 쳐들어온 주변 국가에 맞서 프랑스 혁명정부는 ‘국민총동원령’을 내렸다. 이 역사적인 포고령의 1조는 이렇다.

“우리 적이 공화국 영토에서 쫓겨날 때까지 프랑스 전국민은 영구히 군에 소집된다. 젊은이는 전선 전투부대에 참여하며, 기혼남은 무기를 만들고 보급품을 나르며, 여자는 천막과 군복을 만들고 병원에 일하며, 어린이는 낡은 천으로 붕대를 만들며, 늙은이는 광장에 나가서 용사들의 사기를 북돋고 공화국의 단결을 선전할 것이다.”

대혁명의 얄궂은 계승자인 나폴레옹의 군대 그랑 아르메가 거둔 연전연승은 나폴레옹의 천재성보다는 국민의 동원이 가능해진 사회 구조의 변화에서 비롯됐다. 이렇듯 국력을 총동원해서 예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의 대규모 고강도 장기전을 수행할 가능성, 달리 말해 총력전의 가능성을 슬쩍 보여준 역사적 사건이 바로 프랑스 대혁명이었다. 하지만 그 총력전의 가능성은 1차 대전까지는 말 그대로 가능성으로 남았다. 앞서 말한 대로 유럽 문명권이 한 세기 동안 평화를 누렸기 때문이다.

완전한 평화는 아니었다. 19세기 중엽에 크림전쟁과 남북전쟁이 일어났다. 흑해의 크림 반도에서 세 해 동안 벌어진 크림 전쟁은 증기선과 철도라는 산업혁명의 테크놀로지가 전쟁에 본격적으로 활용되는 양상을 보여주었다. 네 해에 걸친 미국 남북전쟁에서는 민간인을 적법한 공격 대상으로 삼는 현대전의 불길한 조짐이 드러났다. 북군의 셔먼 장군은 “우리는 적의 군대뿐만 아니라 적의 국민과도 싸우고 있다”며 남부 민간인을 공격해 의지를 꺾어야 승리할 수 있다는 주장을 실행에 옮겼다.

하지만 유럽인들은 이런 추세를 감지하지 못했다. 크림전쟁과 남북전쟁은 각각 유럽의 동쪽 끝과 대서양 건너에서 일어난 먼 나라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유럽 한복판에서도 열강의 무력 충돌은 있었다. 1866년에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1870년에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터졌다. 그런데 프로이센이 쾨니히그레츠 전투와 스당 전투에서 각각 오스트리아와 프랑스를 제압했다. 왜소해 보이는 프로이센이 급소에 일격을 날려 훨씬 더 큰 상대를 한두달 만에 쓰러뜨리는 ‘이변’에 홀려 유럽은 결전 개념, 즉 현대전의 승패는 한두 번의 결정적 전투로 갈린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군인보다 민간인이 더 많이 죽는 전쟁의 시작

1차 대전의 초기 양상은 그 고정관념에 부합했다. 전쟁에 뛰어든 모든 사람이 각자 자기 나라가 결전에서 승리하는 시나리오를 마음 속에 그렸다. 독일군이 동부전선 타넨베르크에서 러시아군을 완벽하게 무찌른 다음 파죽지세로 프랑스로 진격할 때 독일의 계획은 맞아떨어지는 듯 했다. 하지만 마른 전투에서 일격을 당한 독일은 파리를 점령하지 못했다. 이때부터 전선은 교착 상태에 들어갔고 군인들은 참호를 파기 시작했다. 파괴력과 정확도가 비약적으로 향상된 대포가 위력을 떨치는 전장에서 살아남으려면 땅을 파고 들어가 몸을 숨겨야 했다.

대포와 더불어 기관총이 활약했다. 지휘관의 호루라기 신호에 따라 참호에서 뛰쳐나와 “돌격 앞으로”를 외치며 공세에 나선 군인은 적군 기관총의 위력 앞에 너무나 무기력했다. 수비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죽여도 죽여도 적군은 보충병으로 손실을 메우면서 끝없이 몰려왔고 끝도 없이 포탄을 쏘아댔다.

전쟁이 장기전으로 바뀌면서 결전 개념은 아득한 전설이 됐고 그 자리에 소모전 개념이 들어섰다. 적을 단번에 깨뜨리기보다는 서서히 지치게 만들어 제압한다는 것이었다. 소모전에는 물량전이 따르고 물량전의 기반은 공업 생산력이다. 군수물자를 생산하는 공장이 군단만큼 중요해졌다. 교전국 지도부는 사회주의자를 정부에 끌어들였고 노동조합에게 양보를 했다. 그래야 공업이 원활하게 돌아가 군수물자를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성도 동원됐다. 전선에 나간 남성 대신 여성이 군수공장에서 기계를 돌려 소총과 대포와 폭약을 만들었다.

심지어 예술도 동원됐다. 19세기까지 전쟁에서 화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전투 장면을 화폭에 담아 승리를 그림으로 남기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1차 대전 때 정부는 화가를 동원해서 전쟁 포스터를 제작했다. 적군이 모든 것을 깨부수고 무력한 아녀자를 죽이는 야만인으로 묘사된 포스터를 본 국민이 적개심을 불태우며 더 열심히 일하기를 바란 것이다.

국가의 역량을 최대한 동원해 전쟁을 수행하는 총력전에서는 민간인도 전투원만큼 중요했다. 여기서 전쟁의 성격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난다. 예전 전쟁에는 전투원만 참여했지만 총력전에는 모든 국민이 관여한다. 그렇다면 전선의 상대편 군인뿐만 아니라 상대국 후방의 민간인도 적이 아니겠는가?! 1차 대전 교전국의 정부와 군부는 적국 민간인의 살상을 전쟁수행 방식으로 체계화하기 시작했다.

독일의 빌헬름 황제포는 100㎏이 넘는 포탄을 130㎞까지 날려보낼 수 있었다. 전선에서 쏜 포탄이 파리 시내의 공원에 떨어져 큼지막한 탄공이 생겼다. 명중률은 떨어졌어도 시민의 공포는 극심했다. 독일군 비행선은 야음을 틈타 해협을 건너 런던에 폭탄을 떨어뜨렸다. 해군으로 바다만 지키면 섬나라 영국 본토는 안전하다고 철석같이 믿어온 영국인은 공황 상태에 빠졌다.

1차 대전 기간 전선에서 죽은 군인의 수가 850만명인데 후방에서 목숨을 잃은 민간인은 1,000만명이었다. 총력전에서 발생하는 숱한 민간인 피해는 부수적 결과가 아니라 필연적 결과였다. 이런 추세는 2차 대전에서 더 크게 증폭된다. 현대의 총력전에서는 군인보다 민간인이 더 많이 죽는다는 역설이 빚어진다. 그 시작이 바로 1차 대전이었다.

류한수 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 교수

류한수 상명대 교수
류한수 상명대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