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ㆍ생명과학 회사로 변신
성장전략 안 맞는 사업부 정리, 알짜 석유회사 코노코도 매각
새로운 사업구조 구축 위해 종자ㆍ식품회사 잇달아 인수
변화의 힘은 과학적 역량
전세계 150곳에 연구개발 센터
1998년 가을 미국 델라웨어주 윌밍턴시의 듀폰 본사. 당시 듀폰의 최고경영자(CEO) 채드 할리데이 회장을 비롯한 수뇌부는 창사 200주년을 앞두고 글로벌산업의 미래 전망과 메가트렌드 변화를 파악하기 위해 전세계 50여명의 전문가들을 초대해 포럼을 열었다. 각계 전문가들은 향후 50년의 거대한 흐름이 과연 어디로 향할지 정치ㆍ경제ㆍ사회ㆍ과학 분야별 전망과 예상수치 등을 쏟아내며 열띤 논쟁을 벌였다.
그 중에서 듀폰 경영진을 사로잡은 것은 바로 식량 공급의 확보가 미래 산업의 열쇠가 될 것이라는 예측이었다. 인구의 빠른 증가로 식량 공급이 아프리카 등 발전도상국들의 최우선 과제로 떠오르면서 농업이 향후 세계 산업을 바꿀 새로운 성장동력이 될 것이라는 전망은 변신의 기회를 모색해온 듀폰을 흥분시켰다. 사실 1990년대 들어 세계 섬유산업 성장은 정체됐고 그 중심이 중국 등 개발도상국으로 넘어가면서 듀폰은 갈수록 빨라지는 시장 변화속도에 큰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식량 공급이 미래 산업의 핵심이 될 것이라는 포럼 참석자들의 예측이 듀폰 경영진에게 새로운 100년을 책임질 사업 구상을 안겨준 셈이다.
212년의 역사를 가진 듀폰은 처음 100년을 화약제조업체로, 그 다음 100년은 화학소재 개발에 집중했다. 듀폰은 자신들의 핵심역량인 화학 분야와 생명공학의 통합이 향후 농업 산업의 발전은 물론 기후변화 문제 해결의 관건이 될 것이라는 점을 직감했다. 이런 동물적 감각을 사업적 확신으로 발전시켜나갔음은 물론이다. 듀폰은 새로운 사업구조 구축을 위해 세계 유수의 종자회사와 식품회사를 잇달아 인수, 다양한 기술을 축적하며 변신을 준비했다. 포럼 개최 이후 16년이 지난 현재 듀폰은 ‘화학ㆍ섬유 분야 세계 1위 제조업체’라는 타이틀을 과감히 벗어 던지고 농업과 생명공학에 집중한 새로운 사업구조를 지닌 글로벌 기업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듀폰의 변신은 과학의 힘
“듀폰은 ‘종합과학회사(Integrated Science company)’다. 1802년 미국 최초의 화약제조에서부터 패션의 혁명을 이끈 나일론, ‘섬유의 반도체’로 불리는 스판덱스 원료인 라이크라, 냄비에 음식물이 눌어붙지 않게 하는 테플론에 이르기까지 축적된 과학 역량을 이용해 사회를 변화시키는 제품들을 만들어왔다. 듀폰의 핵심 전략은 바로 이 같은 과학 역량을 강화해 혁신적인 제품으로 새로운 시장을 창출해 나가는 것이다.”
토마스 코넬리 듀폰 부회장 겸 최고혁신책임자(CIO)는 20일 국내 언론 최초로 한국일보와 가진 이메일 인터뷰에서 “3세기에 걸친 듀폰 변신의 힘은 바로 과학적 역량”이라며 “사회에 큰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과학 역량 개발에 노력을 집중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코넬리 부회장은 “듀폰이 화약제조로 출발했으나 약 100년 전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는 혁신의 필요성을 느껴 화학 전문회사로 변신했다“며 “이제 21세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또 다른 과학과 혁신적 제품“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또 다른 과학’을 이렇게 설명한다. “지난 50년간 인구가 급증해 2050년엔 90억명에 이를 전망이다. 인구가 늘면 갖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과연 식량을 어떻게 공급할 것이며 안전하고 영양가 높은 식품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한정된 화석연료량을 고려할 때 필요한 에너지 자원을 어떻게 공급할 것인가? 사람들의 안전을 어떻게 지키고 그들의 가정과 직장을 보호할 수 있을까? 이 같은 21세기 인류의 도전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듀폰 스스로가 기존의 과학 역량을 변화시켜야 하고, 지금과는 다른 종류의 과학이 필요하다.”
그는 ‘또 다른 과학’을 듀폰이 그간 집중해온 화학ㆍ첨단 소재의 재료과학에다 새로운 생물학 기술을 통합하는 ‘종합과학(Integrated Science)’이라고 규정했다. 여기에는 농업용 종자개발과 작물보호에 이르는 종자유전학과 첨단 바이오 연료개발 등 산업생명과학, 자동차 엔진 경량화를 실현하는 최첨단 재료공학 등이 포함된다.
그렇다면 3세기에 걸쳐 듀폰의 혁신적 변화를 이끌어 온 과학의 힘은 어디서 오는 걸까. 코넬리 부회장은 이를 “사고의 다양성”이라고 압축했다. “과학회사엔 다양한 사고가 무엇보다 중요하며 전환적 변화를 겪는 듀폰엔 더욱 중요한 힘이다.” 듀폰은 전 세계 150곳의 연구개발(R&D)센터에 1만여 명의 과학자와 엔지니어 등을 보유한 인재의 보고로, 매년 22억달러(2조2,715억원)를 투자하고 있다. 지난해 듀폰이 기록한 총 357억달러(약 36조7,602억원)의 매출 중 100억달러(10조2,860억원)가 최근 3년간 이들 R&D센터에서 개발된 신제품에서 나왔다. 지난해 듀폰 연구진이 유명 과학지에 게재한 논문 수는 300개에 달하고, 이들이 미국에서 받은 특허만도 1,000개가 넘는다. 듀폰이 현재 보유한 전세계 특허는 2만4,000여개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이 같은 듀폰 R&D센터의 주요 연구 현황을 분석하고 혁신제품 전략을 결정하는 장본인이 바로 코넬리 부회장이다.
그는 “듀폰이 선택한 미래성장 분야에 집중해 과학적 역량을 발전시켜나갈 수 있었던 원동력은 새로운 사고방식과 기술을 가진 인재에 대한 지속적인 투자와 끊임없는 혁신”이라며 “이는 200년에 걸쳐 인류의 도전과제 해결에 듀폰의 과학 역량을 집중하고자 노력해 온 결과“라고 강조했다.
단호한 사업 구조조정
국내 기업이 문어발식 확장이라면 모를까, 주력 사업을 매각하고 새로운 분야에 뛰어드는 경우는 흔치 않다. 하지만 듀폰은 이런 대담한 결정을 내리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듀폰은 나일론부터 테플론에 이르기까지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화학섬유 제품을 통해 세계 최고의 화학기업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테플론 기술의 원조인 듀폰은 내년부터 전체 매출의 5분의 1을 점하고 매년 10억달러(1조268억원)이상의 영업수익을 올린 기능성 화학제품 사업을 분사할 계획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농작물과 식물기반 소재 등 산업용 생명과학 분야에 올인 하려는 핵심사업 전략과 방향성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코넬리 부회장은 “듀폰은 현재의 성장에 안주하지 않고 미래 성장전략과 맞지 않는 사업부는 과감히 정리하는 전통을 갖고 있다”며 “이는 혁신을 통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사업에만 집중하기 위한 결단”이라고 설명했다.
변신을 위한 듀폰의 단호하고 엄격한 실행 방식은 1999년 섬유사업의 근간인 알짜 석유회사 코노코 매각 사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듀폰은 당시 전체 매출의 절반 이상을 점하던 코노코를 매각하고 세계적인 종자회사 파이오니어를 인수했다. 코노코 매각은 당시 회사의 매출 규모를 절반 이상 떨어뜨리는 결과로 이어졌지만, 듀폰은 장기적인 변신을 위해 고통을 감내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듀폰은 창사 200주년을 맞은 2002년부터 본격적인 변신에 나섰다. 나일론을 개발해 전체 매출의 25%를 창출하던 핵심 섬유사업 부문을 매각하고 농약전문 화학기업인 그리핀과 식품첨가제 기업 솔래 등을 인수했다. 2012년엔 세계적 효소회사인 덴마크 다니스코를 인수했다. 이런 공격적인 사업구조 개편을 통해 농업ㆍ생명과학 회사로 변신할 수 있었던 것이다.
코넬리 부회장은 듀폰이 이처럼 핵심 사업을 신속히 정리할 수 있었던 데는 이사회의 역할이 주효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듀폰의 변신은 모두 전략과 실행에 따른 것이다. 하나만 잘해서는 충분치 않다. 둘 다 완벽해야 변신에 성공할 수 있다. 실행의 주안점은 주주가치와 생산성 제고를 위한 철저한 가치사슬(value chain) 접근법이다. 회장을 포함해 12명으로 구성된 이사회는 기업 매각ㆍ인수 결정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사회 전체 시간의 50~75%는 전략을 논의한다. 나머지는 전략을 실행하는 방법을 검토하고, 사업 구조조정을 협의한다. 사업 환경은 끊임없이 변한다. 그 변화가 듀폰의 미래에 미칠 잠재적 영향을 고려해 전략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이사들의 통찰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변화를 두려워 말아야
듀폰은 212년 동안 3차례의 혁신적인 변화를 경험했다. 대변신을 이끈 원동력은 단순한 카멜레온식 변화로는 생존할 수 없다는 시대적 통찰이었다. 향후 듀폰은 또 어떤 모습으로 변신할 것인가. 코넬리 부회장은 “ 듀폰은 앞으로도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는 과학역량의 강화를 통해 변신을 계속해 나갈 것”이라며 “과거 200년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다가올 200년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변신을 위해선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고 변화를 주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변화는 매일 일어난다. 가격은 오르내리고. 시장에서의 성과는 좋거나 나쁠 때도 있다. 그러나 과학의 힘은 변하지 않는다. 과학에서 새로운 발전이 이루어지면 혁신적인 제품이 나온다. 변신에 앞장서려면 시대에 맞는 과학역량의 강화를 통해 그 변화를 주도하고, 변화의 선두에 서야 한다. 변화를 추진하는 것이 성공적 변신의 핵심이다.”
코넬리 부회장은 변신에 목말라하는 한국 기업들에 대한 충고도 아끼지 않았다. “변화를 추진하려면 갖고 있는 것, 아는 것을 과감히 버릴 수 있어야 한다. 모르는 것을 배우겠다는 열린 마음도 중요하다. 무엇보다 변화를 이끌 새로운 사고방식과 기술을 가져다 줄 인재에 대한 투자가 필요하다.”
장학만 선임기자 loca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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