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재 기업서 중공업그룹으로
외환위기 거치며 성장 한계 절감, 한국重 등 M&A 총 20건 성사
사들인 기업들 통합 해법은
'두산 웨이' 강요 땐 충돌 생겨, 비전 제시 등 통해 하나로 묶어
“기업의 변신(Transformation)이 성공하려면 처음 시작할 때 세운 목표가 일관성 있게 이뤄지도록 초심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선 변하기 위해 필요한 것과 변하기 위한 순간들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거듭된 기업 인수ㆍ합병(M&A) 과정을 거치다 보면 이를 잃어버리는 경우가 다반사다. 끝까지 변신을 위한 철학을 지키는 것이 성공전략이다. ”
지금과 같은 저성장기에 기업의 변신은 중요한 생존전략이다. 급변하는 경영환경을 대비하고 정체된 기존 사업의 한계 극복을 위해 신 성장동력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고유의 핵심 가치를 유지하면서 달라진 환경에 맞게 사업구조를 바꾸고, 새로운 영역을 발굴하는 기업만이 치열한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212년 역사의 듀폰은 핵심사업인 세계 1위의 섬유ㆍ화학 부문을 버리고 블루오션인 농업과 산업 생명과학, 첨단 소재산업에 진출해 종합과학기업으로 변신 중이다. 우리나라에선 기존 사업을 버리고 성공적으로 변신한 기업으로 단연 두산그룹을 꼽는다. 두산은 1990년대까지만 해도 맥주와 커피, 사무용품, 의류 등 소비재를 파는 기업이었다. 그러나 외환위기를 거치며 소비재 기업으로서의 한계를 느낀 두산 경영진은 이들 사업을 모두 정리하고 2000년 한국중공업과 대우종합기계 등을 인수하며 중공업 그룹으로 변신했다. 이런 변신 과정의 중심에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의 리더십이 자리잡고 있다. 최근 서울 한 호텔에서 열린 한중 경제인 행사에 참석한 박 회장을 만나 기업 변신을 위한 경영 노하우를 들어봤다. 박 회장은 예정되지 않은 갑작스러운 인터뷰에도 당황하지 않고 변신의 핵심 포인트를 열정적으로 설명했다.
-두산이 최근 패스트푸드 체인 KFC를 매각하면서 18년 만에 소비재 사업과 완전 결별했다. 중공업 그룹으로의 변신을 성공적으로 마친 셈인데, 짧은 기간에 변신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인가.
“철학을 지키는 것이었다. 생각이 변하지 않아야 변신이 가능하다. 일각에서는 생각이 바뀌어야 변신할 수 있다고 하지만 이는 단기적인 시각이다. 지난 세월 두산의 변신 과정을 돌이켜 보면 처음에 왜 변신을 시작했던가, 목적한 바가 무엇이었나를 항상 염두에 두었던 것이 주효했다. 초심을 잃지 말아야 변신을 해도 사업이 지속적으로 발전한다.”
-2000년 한국중공업(두산중공업)과 2005년 대우종합기계(두산 인프라코어), 그리고 2007년 미 잉거솔랜드 3개 사업부문 인수를 주도했는데, 성공 비결은.
“바로 전략이다. 기업 인수라면 우리나라에선 모두 소유가치에 그 무게를 둔다. M&A를 표현하는 ‘먹었다’, ‘ 왕성한 식욕’, ‘아직도 배가 고프다’와 같은 수사적 표현이 모두 소유에 가치를 둔 것이다. 입찰에 참여해 돈을 내고 기업을 사들이는 행위는 가장 쉽고 간단한 방식이다. 중요한 것은 인수 전에 인수 후 기업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어떤 일을 할 것인가에 대한 철저한 분석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사기 전에 이 회사를 인수하면 얼마나 자산을 줄이고 경쟁력 강화를 위해 투자 할지를 생각해야 한다. 그것이 준비돼야 다음 두 가지가 가능하다. 우선 적당한 가격을 써낼 수 있다. 기업이 어느 정도 가치가 있고 추가로 돈이 얼마나 들어가야 하는지를 정확히 알아야 기업 인수 가격을 써낼 수 있는 것이다. 두 번째는 인수 후 즉시 기업의 가치 증대를 위한 활동에 들어갈 수 있다. 사전에 이 같은 검토를 마친다면 인수 기업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업무 가치까지 미리 파악할 수 있다. 기업이 다른 기업에 인수되면 간혹 인적 청산부터 이뤄지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이른바 점령군을 보내 인적 청산에 나서는 것은 경영을 편하게 하기 위한 목적일 수 있지만, 기업 가치를 끌어올리는 데는 도움이 안 된다. 특히 해당 기업의 사정을 잘 모르는 비전문가로 구성된 점령군이 인적 청산을 하는 것은 필패의 지름길이다.”
-1998년부터 지금까지 총 20건의 M&A를 거듭하며 중공업 기업으로 변신하는 과정에서 우여곡절도 많았을 텐데 무엇이 가장 어려웠고 어떻게 극복했나.
“사실 두산처럼 기업 인수를 통해 성장한 회사는 변신을 위한 초심을 잃어버리기 쉽다. 성장동력을 찾기 위해서, 또 재무적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서 등 여러 이유로 기업 인수를 거듭하다 보면 왜 이 기업을 인수하는지에 대한 궁극적인 목적을 잊어 버리는 경우가 많다. 습관이라는 것은 정말 무섭다. 특히 기업 인수에만 집착하다 보면 더욱 그렇다. 두산은 사업 포트폴리오를 바꿔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고, 일관되게 이를 추진하면서 지금까지 왔다. 그러나 인수를 거듭하다 보면 인수 자체의 매력과 유혹에 휘둘리게 된다. 예컨대 기업을 인수하면 외형이 많이 커지기 마련이다. 100억짜리 회사가 6개월간 30억짜리 회사 3개를 인수할 경우 연말에 재무제표를 보면 외형이 90% 커지고 이익과 자산도 늘어난다. 비록 대차대조표에서 부채가 늘어 기업 건전도가 낮아지지만, 기업을 인수하는 회사로선 외형 확대에 대한 유혹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결국 기업 인수 자체가 목적이 돼 버린다. 이 경우 사들인 회사들의 가치 증대가 이뤄지지 않은 채 건강하지 못한 기업이 늘어 리스크가 커지는데도 이를 간과하기 쉽다. 따라서 무엇을 위해, 어떤 가치증대를 목적으로 기업을 인수했는지를 항상 유념하는 게 중요하다.”
-변신을 위해 18개의 소비재 기업을 매각하는 데 18년이나 걸렸다. 전문화를 위해선 더 빨리 매각할 수도 있었을 텐데.
“변신을 위해선 사업의 집중화나 전문화도 중요하지만, 단기적인 시각으로 이에 너무 집착하는 것도 곤란하다. 전문화를 위한 전문화는 그 자체가 비효율적이다. 핵심 사업을 바꿀 때는 진입전략도 중요하지만 출구전략은 더 중요하다. 기업 변신을 위한 전문화를 위해 무리한 출구전략을 쓰면 그 자체가 비효율을 낳기 쉽다. 일례로 KFC를 매각하는데 18년이 걸렸다. 차근차근 조금씩 지분을 팔았다. 전문화를 위한 전문화였다면 더 빨리 팔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전문화는 시너지를 얻고 사업이 잘되기 위해 하는 것이다. 출구 비용이 너무 커서 전문화하는 분야의 투자에 손실을 준다면 그건 안 하는 것보다 못하다. ‘메이크 잇 센스’ (합리적인) 방식으로, 합목적적으로 정리하기 위해 오래 걸렸다.”
-성공적인 변신을 위해선 기업조직과 기업문화도 바뀌어야 한다. 사들인 기업들을 하나의 두산으로 만드는 작업도 만만치 않았을 텐데.
“일반적으로 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표방하는 문화를 기업문화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두산 사람들이 인수 기업에 들어가 인적 청산을 한다고 해도 그 기업의 문화가 바뀌지는 않는다. 그 기업에는 그간 조직을 움직여온 고유한 문화가 있어 일방적으로 ‘두산 웨이’를 밀어붙인다면 반드시 충돌이 일어난다. 두산이 지향하고, 상대기업도 비전을 갖고 바라보는 새로운 기업문화를 이해시켜 심어줘야만 유기적인 통합이 이뤄진다. 새로운 비전 제시와 목표의 설정, 인사 평가제도 등 시스템과 프로세스를 통한 기업문화의 통합이 관건이다.”
- 한동안 ‘승자의 저주’라는 말이 떠돌았다. 글로벌 금융위기 속에서 잇단 대형기업 인수로 재무 부담에 시달리는 두산을 우려하는 시각도 있었다. 이런 위기를 잘 극복한 데는 금융공학적 노하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특별한 것은 없다. 투자자들에게 마음을 열고 다가선 것이 주효했다. 다른 투자자와 함께 기업을 인수하는 과정에서 내가 원하는 것에만 집중하면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재무적 투자자가 인수에 참여한다면 안전하게 원하는 이익을 보장해줘야 한다. 그만큼 나도 내주는 것이 있어야 하며, 마음을 열고 윈윈 하는 솔루션을 찾아야 한다. 이기고 지고 승패를 생각하면 파이낸셜 엔지니어링(금융공학)을 할 수 없다. 항상 내가 지불하는 비용이 상대방에게 도움이 되고, 둘이 지불하는 비용이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는 열린 생각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국내 기업들이 신성장동력에 대한 갈증이 큰데도 돈을 쌓아 놓고 투자에는 적극 나서지 않고 있다. 변신을 위한 기업가 정신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많은데.
“우리 기업들이 변신에 목말라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변신은 자신에 적합한 방법을 찾아 일관성 있게 추진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업 변신에 있어 교과서적인 정답이란 없다.”
장학만 선임기자 loca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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