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보다 더 실망스러웠다. 평양보다 서울을 먼저 방문한 첫 중국 지도자라는 화려한 포장과는 달리 한중 정상회담의 내실은 너무 빈약했다. 빈약했다기 보다는 한국외교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회담이라고 하는 편이 낫겠다.
주요 현안에 대한 합의는 거의 없었다. 북핵과 6자회담에서는 이견을 노출했고, 일본 과거사 문제는 공동성명에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 중국은 오히려 미국이 반대하는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과 위안화 국제화에 한국 참여를 요구해 우리를 구석으로 몰았다. 일본의 과거사와 재무장 문제로 한미일 3각 공조가 흔들리는 틈을 타 그 중 가장 약한 고리인 한국을 압박해 자기 쪽으로 끌어들이려는 전략이다. 전문가들의 지적대로 동북아 ‘완충지대’를 북한에서 한반도 전체로 확대하겠다는 의도다.
미국과 유럽이 소련에 대항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라는 안보체를 만들었듯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과 일본이 안보동맹을 강화하는 것이 지금의 동북아 정세다. 대중외교로 정치적 지렛대를 넓히려던 우리 정부로서는 중국의 적극적인 공세에 입지만 더 옹색해지는 결과를 맞았다.
그러면 대미관계는 어떤가. 일본의 집단적자위권 행사 선언에 미국은 “대담하고 역사적인 획기적 결정”이라는, 이보다 더 좋은 찬사는 없을 정도의 논평을 내며 환영했다. 그 직후 일본의 미국산 첨단무기 구매결정이 잇따랐다. 군사적으로도 일본의 재무장에 날개를 달아준 것이다. 옳든 그르든 일본의 집단적자위권 행사에 민족적 거부감을 보이는 한국을 동맹국으로 조금이라도 배려했다면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일본을 편드는 논평이 나올 수 있었을까.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지난 5월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 졸업식 연설에서 “해외 군사개입을 최대한 자제하겠다”고 말했다. 미국의 이런 입장이 새로운 것도 아니고 또 동북아에서 일본을 앞세워 힘의 공백을 메우려 하는 것도 새삼스럽지 않다. 문제는 이런 움직임이 동북아의 또 다른 동맹국인 한국을 무시하다시피 하면서 전개되고 있다는 점이다. 무시하는 정도가 아니라 힐난하기까지 한다. 수전 라이스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지난달 “우리의 파트너가 집단적 안보에 대한 자신들의 몫을 부담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일본의 집단적자위권을 시비 걸게 아니라 일본처럼 적극적으로 미국의 집단안보에 동참하라는 것을 경고한 발언이다. 그 전에 존 케리 국무장관은 “한일관계가 미래지향적으로 가야 한다”고 해 한국이 구태의연하게 과거사에 매몰돼 있는 것처럼 지적했고, 조 바이든 부통령은 “미국에 베팅하라”고 원색적으로 한국을 압박했다.
사실 한국만큼 미국이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나라는 지구상에서 찾기 힘들다. 우리보다 훨씬 안보가 불안하고, 그래서 미국을 유일한 안보동맹으로 의지하는 이스라엘 조차 미국에 일방적으로 끌려 다니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이를 현실로 받아들였고, 그것이 지금까지의 대미관계 토대였다. 이런 ‘편안한’ 인식이 중국의 부상과 일본의 재무장으로 동북아 정세가 회오리치면서 변화를 요구받고 있는 것이다. 중국이라는 커다란 적을 두고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 선택해야 하는 미국의 속내가 드러난 때문이다.
미국에게 한국과 일본은 같지 않다. 같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비교도 안된다. 우리가 집단적자위권을 놓고 미국에게 한국과 일본 중에서 선택하라는 듯이 대응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런 점에서 일본이 집단적자위권을 발표한 날 우리 정부가 “한반도 안보에 나쁜 영향을 미쳐서는 안된다”는 식의 안이하고 순진한 논평을 낸 것은 한심한 일이다. 그간 똑같은 논평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할 때마다 한미관계, 미일관계, 그리고 동북아 정세가 우리의 국익과는 반대 방향으로 움직였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다른 말이 나왔어야 했다.
우리가 중국과의 외교지평을 넓히고, 동북아에서 균형자 역할을 하려면 그 출발점은 대미관계의 재정립에서 찾아야 한다. 미국에 예속된 상태, 미국에 아무런 레버리지를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중국과의 관계 격상이나 동북아에서의 새로운 외교공간 확보는 공염불일 뿐이다.
황유석 여론독자부장 aquariu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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