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토요에세이]테트라 코드와 근의 공식

입력
2014.07.18 20:00
0 0

청년에게 오선지를 펼쳐 보였다. 줄줄줄, 칸칸칸 다섯 줄 사이 음표를 나란히 그려 넣으며 ‘음계’를 쌓아 올렸다. 다장조에서 출발해 플랫을 하나 붙이면 바장조, 샾을 하나 붙이면 사장조. 조성과 으뜸음의 원리를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조성과 으뜸음을 찾기 위해선 간단한 공식을 암기하면 편리하다. ‘파도솔레라미시-시미라레솔도파’와 같이 조표가 붙는 순서를 입에 붙도록 외우고, ‘마지막 샾의 윗음-끝에서 두번째 플랫음’ 등의 요령으로 으뜸음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말하자면 이 요령은 ‘기계적으로 암기한 수학공식’과 같은 것이다.

수학공식? 청년의 눈이 반짝인다. ‘파도솔레라미시’에 빗댈만한 수학공식은 무엇이 있을까. 느닷없이 청년에게 ‘근의 공식’을 외워보라고 주문했다. 돌발질문에 당황한 학생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며 이 공식과 이별한지 수년이 지난데다 군대까지 다녀왔다며 너스레를 부린다. 나에게도 고맘때 똑같은 일화가 떠올라 키득거렸다. 대학시절, 짝사랑해 마지않던 물리학과 친구가 느닷없이 ‘근의 공식’을 아느냐 물어왔다. 제대로 외지 못하고 우물쭈물 거리자 “너도 마찬가지”라며 실망을 감추지 않았다. “야, 플러스 마이너스가 조잡하게 붙어 헷갈리잖아!” 항변하니 그는 자신의 전공수업 이야기를 들려줘다.

‘어떻게 그럴수 있냐’ 강의에 들어온 교수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하더란다. 다들 영문을 궁금해 했다. 같은 학교에서 근무하는 음대 교수인 부인과 강의 직전 식사를 하다 ‘근의 공식’을 물었지만 명쾌한 대답을 듣지 못한 것이 이유였다. 근의 공식을 모르고 어떻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가. 수학의 아름다움을 모르고 어떻게 삶을 예찬할 수 있는가. 식사까지 얹혔다는 교수의 하소연을 절절히 전하는 물리학과 청년의 허풍 덕택에 나는 그날 저녁, 창고에 박혀 먼지가 뽀얗게 앉아있던 수학정석을 다시금 꺼내 보아야 했다. 그리곤 입에 자동으로 붙을 때까지 외우고 또 외웠다.

그러나 ‘기계적 암기’가 능사는 아닐 것이다. 원리를 이해하면 매번 외울 필요가 없다. 예컨데, 장음계는 두개의 테트라 코드를 온음으로 연결시킨 결과물이다. 어느 음에서 시작하건 온음-온음-반음으로 이뤄진 테트라 코드를 연결시키면 음계가 완성된다. 그러니 굳이 샾과 플랫이 붙는 순서를 외지 않아도 된다. 으뜸음을 찾는 방법도 마찬가지다. 딸림조와 버금딸림조의 원리를 이해한다면 자연스레 으뜸음 찾기를 터득할 수 있다. 악기 앞에서 테트라 코드의 원리를 실재로 보여주며, 나는 천재 수학자를 만났던 다음의 일화도 학생에게 들려 줬다. 파리에서 또래의 수학자를 만나 금새 친해졌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명문학교 ‘에콜 폴리테크닉’에서 박사 후 과정을 이수하던 그녀는 종종 천재의 면모를 보여주곤 했었다. 나는 매우 부끄러워하며 먼지 덮인 수학정석 에피소드를 꺼내 놓았다. 그런데 웬걸! 그녀 역시 근의 공식을 암기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근의 공식이 필요할 때마다, 그녀는 매번 ax2+bx+c=0 의 2차방정식을 놓고 해를 도출해 버린단다. 그리곤 직접 시범을 보여줬다. 종이 위에 쓱쓱, 일필휘지로 전개해가는 그녀의 방정식 풀이과정이 얼마나 근사해 보였는지 모른다. 등호의 오른쪽 옆으로 상수들이 던져지자, 단출한 변수, x만이 왼쪽에 홀로 남았다. 내가 달달달 외우느라 고생해 마지않던 그 근의 공식이 종이 위에 완연히 모습을 드러냈을 때, 팔뚝에 솜털이 삐죽삐죽 일어났다. “나는 암기를 잘 못해. 대신 원리를 이해하면 그 노력을 덜 수 있지”라고 겸손히 말하던 그녀는 어느새 카이스트의 수학과를 이끌고 있다.

음계의 원리도 마찬가지다. 무작정 조표가 붙는 순서를 외우며 으뜸음을 찾기 전에 테트라 코드의 태고적 비밀을 이해할 수 있다면, 원운동으로 순환하는 딸림조와 버금딸림조의 비밀을 이해할 수 있다면, 근의 공식을 외우지 못한다고 나를 주눅들게 하던 물리학과 친구의 허풍에 좀 더 의연히 대꾸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니 복학을 앞두어 근의 공식이 생각나지 않고, 피아노를 다시 시작하려니 오선지가 황망히 느껴지는 청년이여, 힘차게 화이팅!

조은아 피아니스트·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객원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