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 유아 유괴사건 실화 담은 '울프 앳 더 도어' 국내 개봉
섬세한 인물 묘사로 스페인 산세바스티안 영화제서 호평
"배우 다루는 특별한 힘 지닌 봉준호-박찬호 감독 좋아해"
한국영화에 큰 영향을 받았다고 밝힌 젊은 브라질 감독의 영화 한 편이 지난 10일 조용히 국내 개봉했다. 봉준호 감독의 ‘마더’와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를 특히 좋아한다는 페르난도 코임브라(38) 감독의 데뷔작인 ‘울프 앳 더 도어’다.
영국 록밴드 라디오헤드의 노래에서 제목을 따온 이 영화는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여섯 살 유아 유괴사건을 다룬다. 지난해 스페인 산세바스티안 영화제의 남미영화 경쟁 부문에서 수상하며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인물들의 심리 변화를 가감 없이 포착하는 룰라 카발호의 촬영과 감독의 섬세한 캐릭터 묘사가 뛰어나다. 브라질에 있는 감독을 이메일로 인터뷰했다.
-월드컵 4강전에서 브라질이 독일에 큰 패배를 해서 충격이 컸을 것 같다.
“전국민이 충격을 받았다. 네이마르의 결장으로 경기에 질 것이라는 예측이 있었고 독일팀이 대단한 팀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런 결과는 절대 예상하지 못했다. 브라질 국민을 기만한 것이다. 이해하기 힘들다.”
-첫 장편영화의 소재로 유괴 사건을 다루게 된 이유는.
“의식적으로 선택한 것은 아니다. 이 이야기를 우연히 발견한 뒤 영화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이 사건이 브라질에서 당시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졌다고 생각하나.
“사건이 일어났을 때는 60년대였는데, 인간이 할 수 없는 미친 짓으로 여겨졌다. 그 여자는 인간이 아닌 괴물 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본성에 기반한 지극히 인간다운 행동이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인간이 할 수 없는 미친 짓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원초적 본능과 그 잔인함에 대한 것이다.”
-실제 사건을 취재하면서 가장 놀란 점, 가장 주목했던 점은 무엇인가.
“가장 놀란 점은 아이의 부모, 즉 부부가 이 비극적 사건 이후에도 이혼하지 않고 함께 살았다는 점이다. 그 사실을 알고 나는 혹시 사건에 연관된 두 여인 사이에 아무도 모르는 어떤 관계가 있었던 게 아닌가 생각하게 됐다.”
-실제 사건을 영화로 옮기면서 가장 중점을 둔 부분은 무엇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이 이야기를 윤리적인 잣대로 판단하지 않는 것이었다. 캐릭터 중 누구도 심판하고 싶지 않았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게 할 만한 요소는 모두 피하려고 했다.”
‘울프 앳 더 도어’는 평범한 수사극으로 시작해 TV 드라마 ‘사랑과 전쟁’을 연상시키는 불륜극으로 바뀌었다가 ‘그것이 알고 싶다’에 나올 법한 끔찍한 범죄극으로 끝난다. 리우데자네이루 인근 마을에서 어린 여자아이가 유괴당하자 경찰은 유력한 용의자로 아이 아버지 베르나도(밀헴 코타즈)의 내연녀 로사(린드라 릴)를 지목한다. 로사는 다른 여자가 데려갔다고 발뺌하다가 결국 유괴 사실을 털어놓는다. 그러나 아이가 어디 있는지는 모른단다. 로사는 왜 아이를 데려갔고 아이는 어디에 있는 걸까. 영화는 평범한 여인이 뒤틀린 관계 속에서 폭력적 본성을 드러내게 되는 과정을 찬찬히 응시한다.
-영화가 초반부터 범인을 밝히고 들어간 다음 플래시백을 통해 과거 일을 보여준다. 그런 전개 방식을 택한 이유는.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건 ‘누가’ 저질렀는가가 아니라 ‘왜’, ‘어떻게’ 저질렀는가‘이다. 관객이 캐릭터들을 처음 봤을 때 누굴 신뢰해야 할지 알 수 없게 하는 걸 좋아한다. 관객은 이야기에 깊숙이 파고 들어간 뒤에야 비로소 그 캐릭터를 둘러싸고 있는 베일을 한 겹 한 겹 벗기게 된다.”
-여주인공의 심리 변화를 꼼꼼히 다루다 보니 끔찍한 범죄에 심리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 같다는 비판도 있다.
“이 영화는 세계 여러 나라의 많은 영화제에서 상영되었지만 도덕적인 면에서 비판하는 것은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사람들은 범죄를 미워하지만, 어느 정도 동기를 이해하곤 한다. 그러나 만일 누군가 도덕적인 관점에서 이 영화가 범죄에 심리적 정당성을 부여한다고 비판한다면, 나는 영화 안에서 도덕적인 관점에 비추어 세상을 다루는 것엔 크게 흥미가 없다고 말하고 싶다. 도덕이라는 시선으로부터 자유롭게 세상을 보고 싶다. 그것이 바로 예술이 할 수 있는 제안이다.”
-롱테이크 장면이 많다. 쇼트를 나누지 않고 길게 찍은 이유는.
“장면을 더 사실적이고 자연스러우며 긴장감 있게 만들기 위해서다. 배우들의 연기에 많은 것을 기대고 있는 영화이므로 리얼 타임의 롱테이크로 찍는 것이 배우들의 연기가 주는 임팩트를 극대화한다고 생각한다. 관객은 단지 한 배우가 대사를 하고 있는 것만 보는 것이 아니라 상대 배우의 반응까지 볼 수 있다. 대사들 사이의 침묵 또한 롱테이크에서 더욱 실감이 난다.”
-영화가 후반으로 갈수록 여주인공의 뒷모습을 많이 보여준다. 마치 뒤에서 여주인공을 따라가는 듯한 느낌을 주는데 그런 촬영 방법을 택한 이유는.
“관객이 인물에게 아주 가까이 있는 듯한 느낌을 주기 위한 것이다. 로사를 뒤따르면서 동시에 관객의 시선이 로사의 시선과 겹치게 된다. 관객은 로사의 얼굴을 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로사가 보는 것을 보고 듣는 것을 듣게 된다. 또한 이 카메라워크는 캐릭터를 인지하게 하는 일종의 페티시즘적 장치이기도 하다. 어떤 특정 요소가 화면에 반복적으로 비춰지면 관객은 그것이 나올 때마다 그 인물을 떠올리게 된다. 로사의 경우는 그녀의 목덜미와 긴 귀걸이가 그녀를 상징하는 페티시즘적 요소다.”
-봉준호 감독의 '마더'와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를 무척 좋아한다고 들었다. 이 두 영화 또는 두 감독의 연출 스타일이 당신에게 미친 영향이 있나.
“그렇다. 내 영화들은 아시아 영화로부터 특별한 영향을 받았다. 일본의 미조구치 겐지, 구로사와 아키라, 오즈 야스지로 같은 과거의 거장들부터 대만의 차이밍량이나 후샤오시엔 같은 동시대 감독들 그리고 특히 봉준호와 박찬욱 같은 한국 감독들의 영향이 크다. 그들은 모두 프레임을 구성하는 방법이 매우 그래픽적이다. 그리고 배우들을 다루는 특별한 방법을 가지고 있다. 아시아의 배우들은 절제된 연기를 선보이다가 적절한 순간이 왔을 때만 폭발시킨다.”
-이 영화에서도 그런 영향을 찾아볼 수 있나.
“우선 동시대의 한국 영화가 대체로 매우 용기 있다는 점을 말할 필요가 있다. 한국 감독들은 브라질이나 남미 영화에서는 보기 힘든 강렬하고 잔혹한 이야기들을 선택한다. 이러한 점은 내가 이 영화를 만드는 데 많은 영감을 주었다. 토론토국제영화제에서 질의응답 시간에 이러한 잔혹한 이야기가 브라질 영화에서 흔한지 묻는 질문이 있었는데, 나는 ‘그렇지 않다, 이 영화는 오히려 한국영화를 더 닮았다’고 답했다. 브라질 사람들은 인간의 어두운 측면을 말하는 것에 대해 다소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브라질에서 ‘올드보이’ 같은 영화는 절대 안 나올 것이다!
이 영화에서 한국 감독들을 생각나게 하는 장면이라면 간단히 두 가지 예를 들 수 있다. 배우들의 옆 모습을 보여주면서 대사나 액션을 찍는 건 한국영화에서는 아주 흔하지만 브라질영화에서는 그렇지 않다. 베르나도와 경찰의 긴 대화 장면이 있는데, 여기서 두 인물은 오로지 옆모습만 보인다. 이 장면을 찍을 때 나는 한국영화의 스타일을 떠올렸다. 다른 예로는 로사가 범행을 저지르는 부분을 들 수 있다. 매우 묘사적인 촬영 기법과 여배우의 얼굴을 오랫동안 비추는 것, 특히 여배우의 얼굴을 프레임에 담는 스타일은 봉준호가 영화 ‘마더’에서 놀라운 여주인공(김혜자)을 찍을 때 썼던 쇼트에서 영감을 얻었다.”
-다음 영화가 스릴러라고 들었다. 어떤 작품인가.
“역시 리우데자네이루에서 벌어지는 스릴러인데, 사건 장소는 도시의 다른 지역이다. ‘울프 앳 더 도어’에서는 교외였지만 이번엔 신흥 부자들이 살고 있는 ‘바라 다 티후카’ 지역이다. 줄거리는 고전적인 셰익스피어 스타일의 권력 다툼형 비극인데, 브라질 전역의 불법 도박을 좌지우지하는 범죄 조직을 다룬다. 비극적인 블랙 코미디라고 할 수 있겠다. 제목은 ‘Os Enforcados’, ‘교수형을 당한 남자들’이라는 뜻이다.”
고경석기자 kav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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