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자가 누구인가. 힘센 쪽은 어딘가. 달아날 곳도 없다. 매찜질은 고스란하다. 교전이라니. 민망하다. 도륙 아닌가. 인종주의의 극단에서 죽이는 자도 죽는 자도 인간성을 잃었다.
“이스라엘은 공습을 하기 전에 미리 ‘가짜 미사일’로 가자지구의 민간인들에게 친절히 경고해준다고 주장한다. 알아서들 피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하늘만 뚫리고 사방이 막힌 감옥’과도 같은 가자지구에서, 어디로 도망칠 수 있단 말인가. (…) 인구 180만명 중 100만명 이상이 난민인 가자지구는 세계 최대의 난민촌이자 세계 최대의 감옥이다. 무너진 건물 터에서 재와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숨진 아이들을 나르는 사람들, 피흘리는 아이를 끌어안은 부모들. 그들에게 여기가 지옥이 아니고 어디일까. 가자지구는 인구 절반이 14세 이하의 아이들이다. 도망칠 곳 없이 죽어가는 아이들. 이보다 참혹한 광경은 없다. (…) 또 한 장의 사진이 있다. 가자지구 북쪽, 이스라엘 스데롯의 언덕 위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 가자 공습을 지켜보는 이스라엘인들의 사진이다. 이스라엘군이 발사한 미사일들이 하늘에 흰 줄을 그리며 날아갈 때, 미사일이 가자지구의 어느 구석엔가 내리꽂히고 폭발이 일어날 때 그들은 박수를 친다. (…) 스데롯 시네마의 관객들이 지옥에 있는 게 아니라면, 누가 지옥에 있을 것인가. (…) 스데롯의 관객들은 자기들이 땅을 빼앗고 내몬 사람들, 이웃이자 공존해야 할 사람들이 죽도록 몰아가면서 거기에 박수를 보내고 있다.”
-이스라엘ㆍ가자, 두 개의 지옥(경향신문 ‘로그인’ㆍ구정은 국제부 차장) ☞ 전문 보기
“대부분 국내 매체들도 진실과 영혼이 결여된 채, 친유대계 외신들의 논조를 앵무새처럼 되풀이한다. 하마스가 저항의 표시로 쏘아올린 로켓포 몇 발과 이스라엘의 무차별 표적 공격을 전면전으로 표현한다. 어떻게 이것이 전쟁인가? 분리장벽에 갇히고, 해상이 봉쇄된 상태에서 이스라엘 영토를 통과하지 않으면 밖으로 나갈 수도 없는 집단 감옥에서 이스라엘이 물과 전기마저 통제하거나 끊어버리는 상황에서 ‘여기도 사람 있어요’라고 세상을 향해 외치는 저항을 테러라고 한다. (…) 이스라엘 10대 3명의 납치·살해가 사태의 발단이라면, 지금까지 팔레스타인인 2500명 이상이 납치되어 구금당하고, 살해당하거나 행방불명된 상태다. 누가 누구에게 보복을 해야 하는 것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문제는 서방세계의 방조와 동조 자세다. (…) 온갖 첨단 무기로 무장한 세계 10위의 군사대국 이스라엘과 국제법상 무장을 할 수 없어 소총과 정밀도 떨어지는 재래식 로켓포로 위협 시늉만 하는 하마스를 동일선상에 놓고 전쟁으로 표현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1948년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몰아내고 설립한 이스라엘 국가 자체를 부정하는 아랍 국가는 지금 거의 없다. (…)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1967년 전쟁으로 이스라엘이 빼앗은 이웃 아랍 주권국가들의 영토다. 안보리 결의안이나 국제법으로 되돌려주어야 하는 땅인데도 아직도 대부분의 땅을 이스라엘이 강제로 점령하고 있다. 이는 명백한 국제법 위반이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합의한 1993년 오슬로 평화협정의 정신을 훼손하는 행위다.”
-전쟁 아닌 ‘팔레스타인 학살’(7월 14일자 경향신문 ‘국제칼럼’ㆍ이희수 한양대 교수(중동학)) ☞ 전문 보기
민족주의는 이념보다 집단 정서에 가깝다. 국가에 불리한 실상은 배척되기 십상이다. 해석은 말할 것도 없다. 자유주의의 적이다. 다만 정치가 동원한 허구까지 허용되는 건 아니다.
“박유하 세종대 교수에 대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민ㆍ형사 제소 소식에 ‘올 것이 왔구나’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 판매금지가처분 소송이 덧붙은 데서 알 수 있듯, 지난해 나온 그의 저서 ‘제국의 위안부’(뿌리와 이파리)가 직접적 이유다. (…) 한일 양국의 여러 시각에 접한 경험에 비추어 특별히 새로운 내용은 아니었다. 오랜 논란을 부른 ‘강제동원’을 일부 사례로 한정하는 대신 대부분이 소개업자나 인신매매업자가 개입된 사기나 유괴 등의 결과로 파악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 올 게 왔다는 생각 다음으로 은근한 분노를 느껴야 했다. 자신과 생각이 다르면 헌법적 권리인 학문과 양심의 자유까지도 억누르려는 세태에. 박 교수는 역사 전공자가 아니다. (…) 학계의 통설에 반론을 제기하기 어려운 정통 연구자와 달리 인접 분야 출신의 연구자들의 자유로운 시각과 접근법이 학문 발전에 기여하는 바가 크다. 박 교수도 대표적 예의 하나다. 설사 그의 작업이 뚜렷한 가치를 갖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이런 식으로 입에 재갈을 물리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 성향이 보수든 진보든, 새빨갛던 시퍼렇든, 개인의 지적 호기심, 나아가 헌법적 권리인 학문과 양심의 자유를 억누르려는 사회는 숨이 막힌다. 에드워드 H. 카는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다. (…) 이런 자유로운 역사의 ‘해석 공간’은 개인, 특히 연구자들에게는 커다란 기쁨이다. 그 동안 축적된 역사서술의 틈새를 살펴 그것을 메울 가설과 해석을 펼쳐 보일 기회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박 교수의 책도 그런 기쁨의 산물이라고 볼 만하다. 최소한 우리 사회의 지적 관용과 학문의 자유를 환기시켰다. 그런 시각에 이견이 있다면, 학문적 논쟁을 통해 해소하거나 대비되어 마땅하다. (…) 그런 정당한 경로가 아닌 지식 탄압은 과거 권위주의 정부 시절의 정치권력이 신물 나게 보여주지 않았나.”
-박유하 교수의 피소(한국일보 ‘황영식의 세상만사’ㆍ논설실장) ☞ 전문 보기
“학술언어는 대개 정치적 함의를 바탕에 깔고 있다. (…) 식민지근대화론은 경제학 언어의 탈을 쓴 정치언어다. 이 나라 기득권세력이 자신들의 뿌리를 정당화하는 데 쓰는 담론 도구가 식민지근대화론이다. (…) 자본주의화를 곧 근대화로 보는 것인데, 그런 주장을 학설로 내놓는 거야 학문 행위의 자유이니 말릴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문제는 식민지근대화론이 일제강점기에 자본주의 경제가 발전했다는 단순한 주장을 넘어 식민지를 겪지 않았으면 자본주의 발전을 하지 못했을 거라는 주장으로 나아간다는 데 있다. (…) 이 주장을 더 밀고 나가면 친일파야말로 식민지 근대화에 이바지한 사람들이 된다. (…) 식민지근대화론의 논리를 끝까지 밀어붙이면 항일독립투사들은 일제의 근대화 노력에 발목을 건 시대착오적 훼방꾼이 되고 만다. (…) 이 역사 쿠데타가 마지막에 노리는 것은 친일파의 태반에서 자라나온 해방 후 독재세력, 다시 말해 이승만·박정희와 그 아류들에게 근대화의 주역이라는 역사의 월계관을 씌워주는 것이다. (…) 일제와 독재에 부역하며 기득권을 쌓아올린 무리를 역사적으로 정당화하고 항일·반독재 세력을 헛것과 싸운 자들로 낙인찍어 쳐내는 것이 식민지근대화론의 정치적 임무다. 일제 덕에 근대화 토대를 닦았고 독재 덕에 산업화에 성공했으니 친일이 옳았고 독재가 맞았다는 것이다.”
-식민지근대화론과 역사 쿠데타(한겨레 ‘아침 햇발’ㆍ고명섭 논설위원) ☞ 전문 보기
청와대발 인사 실패의 배경은 간단하다. 대통령의 독선이다. 내 사람 아니면 믿지 않는 게 철칙이다. 제 편은 시퍼런 서슬과 강요된 의리로 묶는다. 문제는 유유상종이란 경험칙이다.
“야당이 정성근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후보자의 사생활 정보를 전달하기 전까지 청와대는 요지부동이었다. (…) 여기서 우려되는 건 독선의 위험이다. “사심이 없다”는 말부터 그런 조짐을 보인다. 뒤집으면 다른 사람은 사심을 가져 내가 항상 옳다는 뜻이 아닌가. 어이없는 검증 실패도 이와 무관치 않다. ‘윗분’의 의지가 지나치게 강하면 내부 검증이 작동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의리’와 짝을 이루는 코드는 ‘친박(親朴)’이다. 새누리당 지도부는 ‘비박(非朴)’ 판이다. 이에 대비해 내각에는 친박들이 포진했다. 혹시라도 당이 협조하건 않건 내각 중심으로 국정을 끌고 가겠다는 포석이라면 걱정이다. (…) 박(근혜) 대통령은 후보 시절 “의리가 없으면 사람이라고 할 수 없죠”라고 했다. 하지만 의리는 대통령이 내세울 도덕률은 아니다. ‘할 말은 하겠다’는 집권당 대표마저 ‘우파 정권’을 강조하면 ‘국민’이 들어설 자리는 사라지고, 통합은 공염불이 된다.”
-박근혜, 김무성, 의리코드(중앙일보 ‘김진국 칼럼’ㆍ대기자) ☞ 전문 보기
“박(근혜) 정부의 인사는 김기춘 비서실장이 위원장인 인사위원회가 맡지만 ‘윗분의 뜻’을 받드는 데 머문다는 혹평을 받고 있다. (…) ‘국회의원은 아무리 부패해도 유권자의 눈치를 보지만, 관료 출신은 아무리 훌륭해도 인사권자의 눈치만 살핀다’는 말이 있다. 관료 출신인 정(진철 인사)수석도 ‘받아쓰기’만 하면 보좌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 (…) 대통령에게 통상의 3배수 명단에 2명을 늘려 5배수로 인사안을 보고하더라도 대통령이 “이 사람은 어때요”라며 다른 사람을 들이밀면 반론을 제기하기 힘들다. 그렇게 ‘수첩 속의 인사’가 낙점된 사례가 여럿이라는 소문이 꼬리를 문다. 그러다 보니 인사 참사가 벌어져 청와대 내에 인사 포비아(공포증)라는 말까지 나와도 누가 잘못했는지 책임을 묻기도 어렵다. (…) 박 대통령도, 김 비서실장도 달라질 가능성이 없다면 정 수석이라도 새 바람을 불어넣어야 한다. 시간이 날 때 인사수석으론 선배 격인 정찬용 전 수석에게 한 수 배우러 가면 어떨까. 인사의 디테일보다, 지엄한 대통령에게 ‘항명’까지는 아니더라도 할 말을 하는 기개는 배우면 좋겠다.”
-청와대의 ‘인사 포비아’(동아일보 ‘최영훈의 오늘과 내일’ㆍ논설위원) ☞ 전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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