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에 조지 오웰은 소설 ‘1984’를 발표했다. ‘유럽 최후의 인간’이라는 제목으로 구상됐던 이 소설은 거리 곳곳에 그리고 집집마다 ‘텔레스크린’과 ‘마이크로폰’이라는 감시 도구가 설치되고, 개인의 감정과 성생활까지 속속들이 통제하는 전체주의의 암울한 미래를 그려낸다. 그래서 ‘1984’는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예브게니 자먀찐의 ‘우리들’과 함께 세계의 3대 디스토피아 소설로 꼽힌다.
1984년 백남준은 ‘매스미디어가 인류를 지배하리라’는 조지 오웰의 비관적인 예언에 대해 예술을 통한 대중매체, 테크놀로지의 긍정적 사용과 ‘지구촌’의 희망적인 미래를 제시하며 대규모의 위성 TV쇼 ‘굿모닝 미스터 오웰’를 기획했다. 그는 “텔레비전은 우리의 뇌를 먹지만 그래도 조지, 당신은 오버했던 것 같아요. 어떤 것들은 아직도 남아 있다”며 “당신은 좀 틀렸어요”라고 말한다. 뉴욕과 파리에서 무용가, 전위음악가, 인기가수, 시인, 코미디 작가 등 장르를 불문한 예술가들이 대거 참여하고 대형 방송사들이 협력한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통해 다채로운 예술이 한 화면에 실시간으로 편집돼 세계 곳곳으로 생중계됐다. 당시 조선일보는 ‘史上 처음 우주예술제’라는 표제의 기사에 백남준과 조지 오웰의 사진을 나란히 붙이고 ‘굿모닝 미스터 오웰의 기획연출을 맡은 백남준씨와 조지 오웰’이라는 기묘한 캡션을 달았다.
소설 ‘1984’의 주요 무대인 ‘오세아니아’는 내부당원과 외부당원, 그리고 80%에 달하는 무산계급으로 이뤄진 초강대국이다. 절대권력을 가진 ‘당’(The Party)은 매일 배급량이 줄어들었다는 발표만 하는 ‘풍요부’, 전쟁을 담당하는 ‘평화부’, 사상범죄를 관리하는 ‘애정부’, 역사를 위조하고 정보를 조작하는 ‘진리부’ 등 네 개의 성(省)으로 나뉜다. 이 성들의 반어적인 명칭과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이라는 오세아니아의 전도된 슬로건은 백남준의 흥겨운 위성축제보다 현재의 시간에 더 가깝게 느껴진다. 조지 오웰이 왜 굳이 ‘1984년’을 선택했는지는 알 수 없다. 사실 숫자는 특별하지 않으며 그가 과거의 역사에서 미래를 그려냈듯이 우리의 미래 역시 현재일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공포스러운 것이다. 대규모의 개인정보 유출과 도시의 틈새마다 설치된 CCTV, 심심치 않게 접하는 정보망의 조작과 검열 사례, 매번 미궁에 빠져드는 권력형 비리들은 소설 속의 예리한 풍자들과 유비(類比)하기에 여전히 손색이 없다.
올해는 ‘굿모닝 미스터 오웰’의 3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들이 잇따라 열릴 예정이다. 번역하면 ‘안녕하십니까 오웰씨’가 될 이 작품을 다시 찾아보며 나는 작년에 고려대 학생이었던 주현우씨가 불법 대선 개입, 철도 민영화, 쌍용자동차와 밀양의 송전탑 사건 등을 들어 사회문제에 무관심한 또래들에게 “모두 안녕들 하십니까”를 물었던 육필(肉筆) 대자보와 그에 대한 강렬한 반응을 동시에 떠올렸다.
용인에 있는 백남준아트센터에서는 17일부터 ‘굿모닝 미스터 오웰 2014’전이 열린다. ‘굿모닝 미스터 오웰’의 여러 방송 버전을 한 공간에서 감상할 수 있고 당시의 큐시트와 스크립트 등 흥미로운 자료들도 함께 전시된다고 한다. 하지만 1984년 이후로도 그리 안녕하지 못한 오늘이기에 전시의 기획자들은 ‘굿모닝 미스터 오웰’과 ‘정보기술과 매스미디어의 명암에 대한 고민을 담은’ 작업들을 함께 소개한다.
친구를 잃고 사지에서 살아남은 단원고 학생들이 도보행진을 했다. 최종 목적지인 국회의사당에 도착하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현장으로 달려가기도 했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은 여전히 인터넷으로 소식을 접하고 매체를 골라보며 학생들의 발걸음에 가슴을 졸였다. 소설의 주인공인 윈스턴 스미스는 애정부의 ‘101호 고문실’에서 맥없이 사랑을 저버렸다. 이런 시기에 예술이 뭘 할 수 있느냐는 자괴감으로 가득한 언어들 또한 나는 두렵다. ‘오웰적’인 미래가 가까울수록 백남준의 말처럼, 하지만 그와는 또 다른 ‘사기 중의 고등사기’를 칠 수 있는 패기 또한 잃지 말아야만 할 것 같다.
이정민 미술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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