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 철암탄광역사촌
“어떤 게 고향일까요? 태어난 곳은 봉화 춘양이지만 제 기억 속에는 태백밖에 없어요. 두 살 때 장성광업소에 취업한 아버지를 따라 엄마 등에 업혀 이곳에 왔으니까요.
학교 다닐 때 제일 먼저 떨어지는 크레파스는 검정색이었어요. 집 앞의 황지천도 검고 분진이 쌓인 도로도 까맸으니 당연하죠. 국민학교 2학년 때 큰집에 갔다가 처음으로 개울물이 투명하다는 것을 알았어요. 아이들이 물장구치고 노는 모습도 처음 봤고요. 그전까지는 개울에는 들어가면 안 된다고만 배웠어요.
안 되는 게 그 외에도 많았지요. 앰뷸런스가 한번 지나가면 한동안은 라면과 국수를 먹을 수 없었어요. 줄초상 치르게 된다고요. 광부들은 3교대로 일했는데, 을반은 오후 2~3시 사이에 출근해요. 아이들이 한창 밖에 나가 놀 시간인데, 여자애가 놀다가 앞을 지나가면 재수없다고 저는 못나갔어요. 이 외에도 밥은 4주걱을 뜨지 않는다, 아버지 신발 코는 항상 집안으로 향하게 놓는다 등 미신이 많았어요. 모든 게 안전과 관계된 것이니까 무시할 수 없었죠.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불러내 장성병원에 가보라고 하면 그 집에 사고가 난 겁니다. 하루 이틀 만에 등교하지 않으면 사망사고인 거죠. 그러면 또 한 동안 수업이 제대로 안 되고…. 그게 광산촌의 일상이었어요. 광부는 두 겹의 하늘을 지고 살고 그의 아내는 세 겹의 하늘을 지고 산다고 하잖아요. 광부는 진짜 하늘과 분진가루 가득한 갱도 안의 하늘을, 아내는 거기에 근심을 더 이고 살았죠.
젊어서 이곳에 들어온 사람들은 빨리 돈 벌어서 뜬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이 곳을 임시 거처로만 여겼죠. 돈도 없지만 번듯하게 집을 지을 필요가 없었던 거예요. 하지만 광부로 일해서 많은 돈을 벌기는 쉽지 않았죠. 그러다 고향으로 돌아가기에는 너무 늙었고 결국 친구와 추억이 있는 이곳에 정착하게 되죠. 저의 아버지도 고향으로 가고 싶어 했지만 진폐 판정을 받고 강원케어센터에서 요양하고 계세요”
광부의 딸 이경희(50)씨, 그녀는 태백시 문화관광해설사다. 철암역 맞은편의 상가건물은 겉보기에 흉가에 가깝다. 간판은 페인트가 벗겨지고 일부는 글자가 떨어져 나갔다. 그녀의 유년시절 기억이 고스란히 담긴 철암탄광역사촌이다. 전시장의 개관 조건은 외관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외지인은 모르고 지나치기 일쑤다. 11개 상점 중 4개는 지금도 영업 중이다. 잘 살펴봐야 한다. 간판과 실제가 다르다. 중화요리 집 진주성은 효소체험장이고, 현덕건설은 국밥집이다. 문구사인 대성사는 분식점이고 봉화식당만 이름 그대로다. 페리카나치킨은 관광해설 사무실이다. 나머지는 탄광촌의 영욕과 애환을 담은 전시공간이다.
1987년 석탄산업합리화 조치 이후 태백의 광산은 200여 개에서 2개로 줄었다. 새벽마다 동해 어물상인과 봉화 채소상인으로 북적이던 철암장은 이제 매달 10·20·30일에만 장이 서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경제개발의 최전선에서 목숨을 잃은 ‘산업전사’만 4,100여명이다. 철암천 제방에 건물을 짓고 그것도 모자라 하천으로 확장해야 할 만큼 북적대던 그 상가와 살림집이 ‘역사관’이 되어야 했던 이유다.
맨 처음 그녀가 왜 전시실로 바로 가지 않고 건물 뒷모습을 먼저 보여주고 싶었는지, 수 십 번도 더 설명했을 텐데 왜 가시가 걸린 듯 목이 메였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철암천 건너편엔 도시락을 들고 출근하며 손을 흔드는 광부 동상이 서 있었다. 그가 바라보는 곳에는 하천 위에 위태롭게 얹힌 살림집 대문 앞에서 한 여인이 마주 손을 흔들고 있다. 여인의 등에 업힌 아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두 살 때 엄마 등에 업혀 태백으로 온 경희씨였다.
글,사진 태백=최흥수기자 choisso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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