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존파 사건ㆍ삼풍백화점 붕괴 등
개인의 악 아닌 사회구조 문제로 확장
사건 이면 파헤치는 편집 돋보여
“더 죽이고 싶은데 못 죽여서 한이 맺힐 뿐이다.”
1993년 추석을 앞두고 천인공노할 연쇄살인사건을 저질러 전국을 충격과 공포에 빠지게 한 지존파의 김현양(당시 22세)은 체포 직후 이렇게 말했다. 아무런 관련도 없는 다섯 명을 잔인하게 살해하고 시신을 훼손한 뒤 불태우기까지 한 이들을 가리켜 언론은 “악마의 대리자들”이라고 했다. 문민정부 시대 충격적인 사건은 계속 이어졌다. 다음해 10월 성수대교가 무너져 32명이 숨졌고, 1995년 6월 삼풍백화점이 붕괴해 500여명이 사망했다. ‘응답하라 1994’ 등이 낭만적으로 추억하던 20년 전의 어두운 풍경이다.
17일 개봉하는 다큐멘터리 ‘논픽션 다이어리’는 지존파 사건을 출발점으로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등을 통해 1990년대 한국 사회의 ‘지존파적’ 측면을 재구성한다. 정윤석(33) 감독이 지존파에 주목한 것은 범행 방식이 잔인해서가 아니라 이들이 ‘가진 자들에 대한 증오’를 범행 동기로 내세웠다는 점이다. 지존파는 부자들의 돈을 빼앗아 10억원을 모으려고 했다. 전혀 다른 사건처럼 보이지만 삼풍백화점 사장도 매출을 늘려 1조원을 모으려 했다. 한국 자본주의의 압축 성장이 만들어낸 이란성 쌍둥이 같은 사건인 것이다.
영화는 지존파 일당에 대해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뒷이야기를 들려준다. 일당 중 한 명은 체포 직후 구치소에서 형사가 시켜 준 잡탕밥을 난생 처음 먹고 나서 “구속돼 있던 두목이 나오면 주려고 강탈해 모은 돈을 한 푼도 쓰지 않았다”고 했다. 지존파 막내 백병옥은 “부모님께 효도하고 싶어서 범행을 했다”고 했다. 카메라 앞에 선 박상구 전 서울구치소 상담목사는 “애들이 다 마음이 여리더라”라고 기억한다. 체포 직후 “어머니를 못 죽여서 한”이라고 했던 김현양에 대해 정형복 전 서울구치소 교도관은 “수감 후 교도관들로부터 이구동성으로 ‘변했다’는 말을 들었고 모두에게 사랑 받았다”고 증언한다. 조성애 전 서울구치소 상담수녀는 엄마가 다섯이라며 “난 엄마도 없다”라고 말한 이를 떠올린다.
당시 지존파 사건을 사회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은 어땠을까. 영화에 삽입된 TV 프로그램 자료 화면이 실소를 안겨준다. 사회 지도층을 자부하는 패널들은 “나쁜 씨앗을 타고난 사람이 나쁜 환경에서 자라면 거의 예외 없이 나쁜 짓을 하게 된다”, “미국에서는 데모를 하면 총으로 쏘는데, 국가 권력에 대한 도전에 대해서는 무기를 사용해서라도 질서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존파를 검거한 고병천 전 서초경찰서 강력반 반장이 “(지존파의) 범행 이전에 사회를 이끄는 사람들, 범인들의 친인척들은 뭘 했냐”고 묻고 나면, 감독은 쿠데타의 주역들인 전두환ㆍ노태우 전 대통령에 대한 자료 영상과 붕괴된 삼풍백화점, 체포된 지존파 등의 모습을 뒤섞은 몽타주 시퀀스를 보여준다. 권력과 자본을 이용해 수백 명을 죽인 사람이 직접 손으로 다섯 명을 죽인 사람보다 관대한 선고를 받을 권리는 누가 부여하는가. 고병천 전 서초경찰서 강력반 반장은 “직접적으로 살해한 것과 미필적 고의로 살해한 것이 내용상으로서는 차이가 없다”고 말한다.
지존파 일당에겐 1995년 11월 사형이 집행됐다. 유례가 없을 만큼 신속한 집행이었다. 국민에게 IMF 외환 위기라는 “지존파 범행보다 큰 사회적 악”(김형태 인권변호사)을 저지른 김영삼 전 대통령은 현재까지 마지막 사형을 집행한 정권의 수장으로 남아 있다. 삼풍백화점 붕괴의 책임이 있는 사장에겐 징역 7년이 선고됐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사형 선고를 받고도 국민 대통합을 명분으로 특별 사면된 뒤 “5.18은 총기를 든 폭동”이라고 말했다.
감독은 주요 사건ㆍ사고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희생자를 만나는 대신 담당 형사, 교도관, 상담목사, 인권변호사, 전 부총리 등을 만나 영화의 부제이기도 한 ‘살인의 탄생’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건의 이면을 넘어 사회의 구조적 문제에 가까이 다가가려는 감독의 사려 깊은 편집이 돋보인다. ‘논픽션 다이어리’가 뛰어난 점은 20년 전 사건들 사이의 연결 고리를 과거형이 아닌 현재진행형으로 다룬다는 점이다. 자료화면 속의 성수대교 붕괴 사고 유가족은 “미리 미리 방지해 줬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라며 “앞으로 이런 일이 얼마든지 올 수 있다”고 말한다.
고경석기자 kav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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