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은한 여름 꽃향기에 이야기꽃 보태면 금상첨화

흩뿌리듯 여우비가 내렸다. 뜨겁게 데워진 열기를 식히듯 아스팔트에선 아슴푸레하게 안개가 피어 올랐다. 28도까지 올랐던 기온은 순식간에 24도로 떨어졌다. 젖은 콘크리트에서 풍기는 비릿함 대신 상큼한 향기가 살짝 코끝을 스친다. 태풍 ‘너구리’가 물러가고 일부 지역엔 폭염주의보까지 내린 날이었다.
여기는 태백이다. 시내라곤 하지만 어디에서나 높은 산과 푸른 숲이 보인다. 시 전체 평균 고도가 해발 890m, 도시계획관리구역만도 740m다. 태백에는 여름에도 모기가 없다는 말은 누구나 들어봤을 것이다. 두 가지를 더 보태야겠다. 업소와 사무실을 제외하면 일반 가정에는 에어컨이 거의 없다. 아파트 베란다에 가끔씩 실외기가 눈에 띄는데, 더위를 정말 못 참는 특이체질일 거란다. 태백에는 논이 없다. 지형자체도 물을 대기에 불리하지만, 벼농사를 하기엔 기온이 너무 낮다.
여름엔 태백이다. 그 중에서도 해발 1,000m가 넘는 백두대간 등산로에 여름 꽃 잔치가 한창이다. 올 여름 태백으로 휴가 계획을 잡았다면 만항재와 함백산, 두문동재와 금대봉 자락의 야생화 트레킹은 어떨까?
산상의 화원, 만항재와 함백산

만항재는 태백과 경계를 이루는 정선군 고한읍에 속한다. 해발 1,330m. 우리나라에서 승용차로 닿은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이다. 차에서 내리면 바로 야생화를 볼 수 있다는 점이 매력이다. 이름하여 ‘산상의 화원’이다. 쭉쭉 뻗은 낙엽송(일본잎갈나무) 숲 아래 야생화 공원을 조성했다. 등산은 필요 없다. 시원한 그늘이 드리워진 산책로를 따라 철마다 피어나는 야생화를 만날 수 있다. 노란 꽃송이 뭉쳐 피는 기린초엔 흰줄표범나비가 꿀을 빨고, 그 위로 터리풀이 하얀 솜뭉치처럼 바람을 탄다. 잔대 대궁은 보라색 종을 매달고, 동자꽃은 어린아이마냥 발간 얼굴을 내밀었다.
말 그대로 야생에서 피고 지는 꽃을 보고 싶다면 도로 맞은편 등산로를 택하면 된다. 이곳에서 함백산 입구까지는 약 1.5km, 고만고만한 오르내림은 있지만 등산이라기 보다는 산책이라고 표현하는 게 맞겠다.

야생화 천국이라고 숲 전체가 꽃밭일 리 없다. 느린 만큼 보이고, 관심 갖는 만큼 더 보인다. 여름 꽃의 대표 색은 흰색이다. 신갈나무 잎사귀가 햇빛을 가린 어두운 숲에 흰 페인트를 뿌린 듯 군데군데 환하다. 노루오줌과 산꿩의다리 꽃이다. 순백의 산꿩의다리에 비해 노루오줌엔 연한 분홍빛이 감돈다. 물레나물과 짚신나물 솔나물도 노란 점을 찍었다.


둥근이질풀과 붉은토끼풀은 새색시처럼 분홍빛이다. 선홍빛 하늘나리는 단연 돋보인다. 땅을 보고 꽃잎을 위로 젖히는 다른 나리와 달리 파란 하늘을 찌를 듯 꼿꼿하고 고고하다.


등산로는 만항재와 태백선수촌을 연결하는 도로에서 끊어졌다 다시 이어진다. 이곳에서 함백산 정상까지는 약0.9km, 해발 1330m에서 1570m까지 오르는 길이니 땀 좀 흘려야 할 구간이다. 힘들게 느껴지면 둘러가는 길도 있다. 정상에 방송 중계탑이 있어 포장도로가 나 있다. 일반차량은 통행 불가다. 약 2.3km, 그늘이 부족하지만 곳곳에서 전망을 즐길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함백산은 남한 땅에서 여섯 번째로 높다. ‘크게 밝다’라는 뜻만큼이나 정상에서 보는 조망이 시원하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라는 도종환의 시처럼 높은 산 정상에 뿌리내린 풀과 나무에겐 바람이 일상이다. 최대한 몸을 낮추는 게 생존의 비법이다. 이맘때 볼 수 있는 꽃나무는 좀조팝나무, 좁쌀만한 분홍 꽃들이 다닥다닥 붙어 송이를 이뤘다.‘좀’은 상대적으로 작은 풀과 나무에 붙는 접두사다. 돌나물마냥 노란 꽃을 피워내는 바위채송화는 강풍을 피해 바위틈에 납작하게 몸을 숙였다. 바위를 적시는 수분만으로 생명을 이어가는 모습이 대견하고 경이롭다.


정상 조금 아래는 보랏빛 꽃잎 하늘거리는 꿀풀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꿀벌보다는 뒤영벌이 더 많이 찾는다. 고들빼기보다 키가 작은 두메고들빼기 노란 꽃잎엔 꽃등에가 앉았다. 옆에는 바람개비 모양으로 분홍 꽃을 피워낼 송이풀이 대기 중이다. 정상에서 두문동재 방향으로 조금만 내려오면 주목 군락지다. 수많은 들꽃이 피고지는 모습을 천 번은 지켜봤을 고사목과 살아있는 주목이 당당하게 능선을 지키고 있다.


두런두런 이야기 꽃 보태면 금상첨화
함백산에서 두문동재까지 약5.26km 트레킹 코스를 건너뛰고 차를 이용해 두문동재에 닿았다. 정선과 태백을 잇는 이 길에도 터널이 뚫려 정상으로 향하는 길은 드라이브나 등산을 하는 차량만 통행해 한산하다. 태백 삼수동과 정선 고한읍 경계인 정상에 약 10여대를 세울 수 있는 주차장이 마련돼 있다. 두문동재(1268m)에서 시작한 트레킹은 금대봉(1418m)까지 1.2km, 30분이면 넉넉하다. 중간지점까지는 등산로라고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순탄하다. 나머지 구간도 경사가 완만하다. 야생화 트레킹이 주 목적이라면 입구에서 약 400m지점 오른편의 헬기장을 지나칠 수 없다.
나무를 베고 맨땅이 드러나면 가장 먼저 자리잡는 것이 들풀이다. 이곳은 지금 큰까치수영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살짝 구부러진 꽃대에 아래부터 하얗게 꽃을 피워 올리는 자태가 맵시 있다. 샛노란 꽃 뭉치를 머리에 인 마타리도 앙증맞다. 사람 키를 훌쩍 뛰어넘는 지리강활은 우산살처럼 퍼진 꽃대가 나무 한 그루처럼 당당하다. 파란하늘에 뭉게구름을 배경으로 파리매와 풍뎅이까지 날면 작은 바오밥나무를 보는 것처럼 이국적이다.


두문동재에서 시작하는 트레킹 코스는 금대봉에서·분주령·대덕산을 거쳐 한강 발원지 검룡소로 이어진다(4시간30분). 검룡소에서 출발해 대덕산에 올랐다가 분주령를 거쳐 다시 검룡소로 내려오는 코스(3시간)도 있다. 대덕산은 이 무렵 범꼬리 군락으로 유명한데 올해는 이미 꽃이 모두 져버렸다. 실망할 필요는 없다. 일월비비추·마타리·뚝갈 등이 차례로 대기 중이다.
낯선 들풀과 꽃 이름을 여럿 언급했지만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이다. 여행은 채우는 것이 아니라 비워내는 것을. 야생화 향기 그득한 산길을 걸으며 가족끼리 연인끼리 더 많은 이야기 꽃을 피운다면 금상첨화이지 않겠는가?

글·사진 태백=최흥수기자 choisso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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