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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토마 피케티의 세기 자본론은 선뜻 손이 갈 책이 아니다. 685페이지의 방대한 분량에 통계와 그래프, 낯선 경제용어가 가득하다. 그럼에도 경제학 서적으로는 이례적으로 베스트셀러가 된 것은 소득 불평등이라는 전 세계의 공통된 이슈를 다룬 때문이다. 아직 번역도 되지 않은 책이 국내에서도 열풍이다. 원서 주문이 쏟아져 보통 선박으로 운송하는 것과 달리 항공편으로 들어올 정도다. 하반기에는 피케티 열풍으로 자본주의 대안을 모색하는 책들이 덩달아 쏟아질 거라는 전망이다.
▦ 미국에서 사놓고 가장 안 읽는 대표적인 책으로 세기 자본론이 꼽혔다. 조던 엘렌버그 위스콘신대 수학 교수는 독자들이 실제로 어느 정도까지 책을 읽었는지를 분석하는 기법을 개발했다. 미국 최대 온라인 서점인 아마존의 전자책 단말기 킨들에 설치된 밑줄치기 기능을 활용해 이른바 ‘호킹지수’를 창안했다. 독자들이 가장 많이 밑줄을 친 구절 5개가 몇 쪽에 있는지 찾아 평균을 내고 이 쪽수가 전체 쪽수에서 차지하는 비율을 따져 지수로 산출하는 방식이다. 난해한 책을 쓰는 우주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의 이름을 딴 것으로 지수가 낮을수록 책을 읽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 피케티의 책에서 독자들이 밑줄 친 5개 구절 중 마지막은 겨우 26쪽이었다. 지수는 2.4%로 잘 안 읽히기로 악명 높은 호킹의 시간의 역사(6.6%)를 제쳤다. 안 읽히는 책을 가늠하는 지표를 호킹지수가 아니라 피케티지수로 바꿔야 한다는 우스개 소리가 나온다. 책이 유명하고 많이 팔렸다고 해서 열독률이 높은 것은 아니다. 국내에서도 마이클 센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2010년 돌풍을 일으켜 베스트셀러가 됐지만 책을 끝까지 읽은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 그러나 책을 샀다고 반드시 읽어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힐 필요는 없다. 프랑스 작가 다니엘 페낙은 “잃어버린 책 읽기의 매력을 되찾기 위해서는 독자의 권리를 복원해야 한다”며 책을 읽지 않을 권리, 건너뛰며 읽을 권리, 끝까지 읽지 않을 권리, 군데군데 읽을 권리, 읽고 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권리 등 열 가지 ‘독자의 권리’를 주장했다. 르네상스시대 프랑스 철학자 몽테뉴의 말은 더욱 위안이 된다. “나는 책들을 뒤적거릴 뿐 탐구하지 않는다. 판단에 도움을 준 담론과 상상력 외에는 모두 잊어버린다.” 사놓기만 했다고, 후딱 읽거나 대충 읽었다고 괴로워하지 말자. 당신만 그런 게 아니다.
이충재 논설위원 cj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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