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헌군주제 이후 쿠데타 19차례
2001년 탁신 정권 출현
쁘렁덩(화해)으로 가는 길은
성장과 민주주의 확대 속에서 갈등하는 아시아 각국을 전문가들이 조명ㆍ분석하는 새 기획 ‘아시아는 지금’의 첫 국가는 태국이다. 관광대국 태국은 정치적으로는 1932년 입헌군주제 도입 이후 무려 19번의 군부 쿠데타가 발생해 민주주의 정착 고비마다 뒷걸음질 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2001년 탁신 친나왓 전 총리 출현 이후 국민이 탁신 찬반세력으로 극명하게 갈린 모습은 흡사 지금 한국을 보는 것도 같다.
뒷걸음질치는 태국 민주주의
지난 5월 쿠데타를 일으킨 태국 군부는 국왕모독죄를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고 있다. 미국, 유럽연합(EU) 등은 쿠테타 직후 비난성명을 냈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쿠데타를 주도한 국가평회질서회의(NCPO)는 지난 6월 초 짜끄라폽 펜케 전 총리실 장관, 짜이 응파껀 전 쭐라롱껀대 교수 등 20여명에 대해 국왕모독 혐의로 소환령을 내렸다. 군부는 쿠테타 직후 253명에 대해 소환령을 내렸다고 밝힌 바 있다. 방면된 대부분은 정치활동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태국에서는 개도국 군부정권이 보여준 전형적인 탈정치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태국에서는 국왕모독죄로 불리는 형법112조에 따라 국왕, 왕비, 왕세자를 비방하거나 위해를 가한 자에게 3~15년의 실형을 선고할 수 있다. 국왕모독죄를 남용한 대표적인 사례가 ‘아꽁’이란 별칭을 가진 암폰 땅나파꾼의 죽음이다. 그는 2010년 5월 친탁신 계열 레드 셔츠의 대규모 반정부 시위 당시 총리 아피싯의 비서에게 국왕을 모독하는 휴대폰 문자메시지를 보낸 혐의로 2011년 8월 체포됐다. 그는 재판에서 문자발신 방법조차 모른다고 진술했지만 법정은 그에게 국왕모독죄 최고형에 컴퓨터범죄 최고형 5년을 더해 20년형을 선고했다. 아꽁은 수감 후 얼마 뒤 옥중에서 숨졌다. 인권 단체들과 레드 셔츠 진영은 수감 후 얼마 안 돼 옥사한 아꽁의 장례식을 이틀간 치렀다.
국왕모독죄의 폐해를 바로잡자고 요구하는 세력에겐 기득권의 보복이 도사린다. 국왕모독죄 철폐를 요구하는 1만명 서명운동을 벌이던 중 갑작스레 구속된 솜욧 프룩사카셈숙에 태국 형사법원은 2013년 1월 10년 형을 선고했다. 사회운동가인 그가 편집장으로 있던 잡지 ‘보이스 오브 탁신’에 국왕을 모독하는 기고문이 게재됐다는 이유다.
군부 정치개입 왕실과 밀월이 토대
태국 군부의 정치 관여의 전통은 왕실과 밀월관계를 기반으로 한다. 1932년 민과 군이 연대해 절대왕정체제를 입헌군주제로 바꾼 입헌 혁명 직후만 해도 군과 왕실 관계는 좋지 않았다. 그러나 공산주의세력 제거 과정에서 군과 왕당파가 협력하며 관계 회복의 물꼬를 텄다. 이후 1957년 왕당파격인 싸릿 타나랏의 군부 쿠데타가 성공하고, 이들이 왕실 성역화 사업을 본격 추진해 왕실 지위가 입헌 혁명 이전으로 복원되면서 밀월이 시작됐다. 1946년 즉위한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 생일인 12월 5일은 아버지의 날, 왕비 생일인 8월 12일은 어머니의 날로 정해졌다.
푸미폰 국왕은 1960년대 후반 학생들을 중심으로 군부정권에 대한 불만이 커지자 군부와 거리를 두며 민간정권 출범을 지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인도차이나(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공산화에 고무된 학생들의 움직임이 급진적 양상을 보이자, 결국 이들에 대한 군과 경찰 그리고 우익 민병대의 유혈진압을 묵인했다.
왕실과 군부의 밀월이 순기능을 발휘한 때는 1981년 출범한 쁘렘 군부정권 시기다. ‘쁘레모크라시’라 불리는 당시 태국은 정치뿐 아니라 경제도 안정돼 동남아 신흥국 반열에 올랐다. 정치적 안정은 게릴라투쟁을 벌이던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화해정책 덕분이었다. 쁘렘 정권에 도전한 두 차례의 쿠데타를 방어해준 푸미폰 국왕은 1987년 60세 생일에 쁘렘 정권으로부터 ‘대왕’ 칭호를 받았다. 쁘렘은 이후 국왕자문기구인 추밀원 의장직을 맡는 등 국왕의 절대적 신임을 받았다. 국왕의 절대권위에 대한 수호를 자처하고 탁신 정권을 무너뜨린 2006년 9월 쿠데타 배후 인물로 쁘렘이 지목됐던 이유다.
선거에 못 이기는 민주당 군부에 기대
탁신 친나왓 전 총리는 민주화로 군부 역할이 줄고, 고령이 된 국왕의 공식 활동도 줄던 시점에 부상한 정보통신재벌 출신 정치인이다. 1997년 태국 경제위기 직후 타이애국당을 창당한 그는 2001년 1월 총선에서 서민을 위한 기초의료보장제도와 농촌개발지원사업 등을 공약하고 실행했다. 역대 어느 정치세력도 관심이 없던 친서민 정책은 학생운동권 출신인 그의 측근들과 시민단체 의견이 반영된 것이었다. 이른바 ‘탁시노믹스’는 성장 정책에서도 성과를 거둬 기업인 수천 명을 회생시켰다.
탁신은 그러나 지지도가 상승곡선을 그리던 중 독단적 통치 행태를 노골화했다. 특히 2006년 1월 탁신 일가가 19억 달러(약 2조원)에 이르는 자산을 해외에 매각하는 과정에서 세금을 한 푼도 내지 않았다는 사실이 공개돼 시민사회 주도의 탁신 퇴진 운동이 일파만파로 번졌다.
탁신의 실각과 망명, 타이애국당 해산이라는 결과를 가져온 2006년 쿠데타는 탁신 찬반 세력간 교착 국면에서 발발했다. 방콕 중산층들이 주를 이룬 반탁신계 옐로 셔츠 진영은 내심 군부의 쿠데타와 군정에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소득 수준이 낮은 북부, 동북부 지역의 주민들로 구성된 친탁신계 레드 셔츠는 탁신 실각 후 처음 실시된 2007년 12월 총선에서 탁신을 지지하는 정치인들이 중심이 된 국민의힘당에 승리를 안겨주었다. 옐로 셔츠는 곧장 탁신 체제 종식 투쟁에 다시 나섰고 2008년 11월 말에는 수완나품 국제공항을 점거하는 등 고강도의 정권 퇴진 투쟁을 벌였다.
결국 태국 헌법재판소는 선거법 위반을 이유로 집권 국민의힘당에 해산 명령을 내렸다. 이때 일부 친탁신계 의원들이 민주당으로 이적해 민주당 집권이 가능하게 됐다. 그러나 레드 셔츠는 선거 없이 출범한 민주당 정권의 정통성을 부정하며 반정부 투쟁을 벌였고, 2010년 4, 5월 유혈사태까지 벌어졌다. 마침내 레드 셔츠는 2011년 총선에서 다시 승리하며 탁신의 여동생인 잉락 친나왓을 수반으로 하는 프어타이당 내각을 출범시켰다.
그러나 2013년 프어타이당이 탁신의 정치적 사면을 노리는 법개정을 시도하자 친탁신계는 다시 위기를 맞았다. 2010년 레드 셔츠 유혈 진압 당시 실질적 책임자였던 수텝 전 부총리가 이끄는 국민민주개혁위원회(PDRC)가 잉락 정권 퇴진 투쟁에 들어간 것이다. 옐로 셔츠의 수뇌부인 PDRC는 지난 5월 끝내 군부 힘을 빌어 잉락 정권을 무너뜨렸다. 선거 경쟁에서 승산 없는 민주당은 군에게 권력을 주더라도 친탁신계에 절대 권력을 줄 수 없다는 ‘질투의 정치’를 택했다.
태국 민주주주의 출발은 ‘화해’ ‘관용’
국왕이 지난 5월 쿠데타를 승인해 향후 태국 쿠데타 반대운동은 국왕 모독 행위로 간주될 소지가 커졌다. 군부는 자신을 옐로-레드간 정치화해를 돕는 중립적 중재자라 내세우지만 군부가 국왕모독죄를 수단으로 반쿠데타 세력의 입을 막는 상황에서 ‘중립’은 레드 셔츠에게 속임수일 뿐이다.
태국어로 ‘화해’를 뜻하는 ‘쁘렁덩’은 2010년 레드 셔츠의 방콕 시내 점거투쟁을 유혈 진압한 후 정국 수습에 나선 민주당 정권의 슬로건이다. 당시 아피싯 총리는 유혈 진압의 불가피성을 홍보하며 정치적 부담을 덜기 위해 애썼다. 잉락 전 총리도 지난해 친탁신계는 물론 반탁신계 주요 인사들을 포괄적으로 사면하는 법안 통과를 시도하며 ‘쁘렁덩’을 실행하려 했다. 그러나 민주당을 비롯한 옐로 셔츠의 큰 저항에 막혔다.
레드 셔츠가 기대하는 화해의 일차 조건은 친탁신계 정당에 표를 던지는 유권자들의 정치적 판단을 존중하는 것이다. 옐로 셔츠는 부패 정치인의 포퓰리즘에 현혹됐다며 레드 셔츠의 탁신 지지를 폄하해왔다. 민주당은 올해 초 조기총선에서 기표행위를 방해한 옐로 셔츠의 폭력 행동과 선거 불참에 동조했다. 이는 탁신계 정당의 집권을 보장해주는 대다수 유권자들 선택을 중우정치로 간주하는 시각을 드러낸 것이다. 의회민주주의를 부정하고 군부 뒤에 숨기를 반복하는 민주당의 발상이 심각한 문제인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탁신 스스로 해외 망명을 접고 법정에 서는 것도 쁘렁덩의 중요한 조건이다. 쿠데타에 반대하는 태국 시민 일부도 탁신을 미얀마의 아웅산 수치와 같은 민주투사가 아닌 베를루스코니 이탈리아 전 총리 같은 도덕적 결함 많은 백만장자 정치인으로 보고 있다.
2006년 쿠데타 이후 국왕모독죄 적용 사례는 급증하고 있다. 그 결과 태국에서는 화해는커녕 극단의 정치가 이어지고 있다. 군부는 국왕모독죄 남발 등 강압으로 정치적 평화를 달성하겠다는 발상을 버리고, 공산주의 세력까지 포용해 정치ㆍ경제분야에서 태국을 신흥국 대열에 올려놓은 쁘레모크라시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이는 민주화 여정에서 일탈을 반복하는 태국 정치에 걸 수 있는 최소한의 기대다.
박은홍 성공회대 교수ㆍ성공회대 민주주의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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