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사로 따라 지하 1950m 내려가자 높이 50m짜리 처분고 '사일로' 6개
10만 드럼 수용... 6.5 강진에도 견뎌
2016년 원전 저장 용량 포화에도 고준위 방폐물 처분은 아직 갈 길 멀어

버스에 올라 10도 경사의 터널 속으로 1,950m를 내려가자 SF영화에 나올 법한 거대한 지하시설 입구에 도착했다. 입구 양쪽에는 철근 콘크리트로 이뤄진 사일로(siloㆍ처분고) 6개가 커다란 입을 벌리고 있었다. 지난 11일 한국원자력환경공단이 공개한 경북 경주시 양북면의 중ㆍ저준위 방사성폐기물 1단계 처분장의 모습이다.
국내 첫 방폐장 1단계 준비 끝
숱한 우여곡절 끝에 경주에 터를 잡은 방폐장이 지난달 말 공사를 마치고 가동 초읽기에 들어갔다. 부지를 선정한 지 약 9년, 1단계 처분장인 지하동굴을 착공한 지 6년 만이다.
핵심시설인 사일로는 개당 높이 50m에 지름이 약 27m에 이른다. 23층짜리 아파트 여섯 동이 나란히 들어설 수 있는 규모다. 경주 석굴암을 수십 배 확대한 듯 수직 원통 몸체에 천장은 돔 형태인 사일로는 내진 1등급으로 건설돼 리히터 규모 6.5 강진에 견딜 수 있다. 사일로 6개에는 앞으로 60년간 원자력발전소와 병원, 산업체 등에서 발생한 방폐물 중 비교적 방사능 방출이 많은 중준위 10만 드럼이 채워진다. 방폐물 처분이 끝나면 사일로 빈 공간은 쇄석으로 메워지고, 입구는 콘크리트로 봉인된다. 폐쇄 뒤 방폐장 주변 방사선량은 일반인 연간 허용량의 100분의 1 정도인 0.01m㏜(밀리시버트) 미만으로 관리된다.
방폐물을 검사하고 보관하는 지상지원시설은 이미 2010년 완공돼 같은 해 12월부터 한울원전과 월성원전에서 방폐물 1,536드럼을 반입하는 등 4,243드럼을 저장 중이다. 서울 노원구 월계동에서 걷어낸 방사능 폐아스콘 707드럼도 이곳에 있다.
원자력환경공단은 12만5,000드럼을 처분할 수 있는 2단계 사업도 시동을 걸었다. 지난해 기본설계를 끝냈고, 올해 말 공청회를 개최한 뒤 이르면 내년 봄 착공할 계획이다. 동굴 처분방식인 1단계와 달리 2단계는 30m 이내 깊이로 방벽시설을 만든 뒤 폐기물을 쌓아 올리고 폐쇄하는 천층방식으로 추진 중이다. 원전 기수가 적거나 확장이 필요하지 않은 스웨덴과 핀란드는 중ㆍ저준위 방폐물을 동굴 방식으로 처분하지만 대부분 국가는 천층방식을 이용한다. 우리는 방사능 방출이 적은 저준위와 극저준위 방폐물을 천층방식으로 처분할 예정이다.
28년 만에 중ㆍ저준위 처분
국내 방폐장 건설은 1986년부터 시작됐다. 정부는 경북 울진과 영덕 등을 후보지로 선정하고 지질조사에 들어갔지만 지역주민 등의 강한 반발로 조사가 중단됐다. 이후 특별지원금 3,000억원을 앞세워 극적으로 경주에 자리를 잡은 2005년 11월까지 19년 간 방폐장은 정치권과 지역사회는 물론 국가 전체를 송두리째 뒤흔든 갈등의 핵이었다.
1990년 충남 안면도, 1995년 인천 옹진군 굴업도 등에서 강한 반발로 방폐장 건설이 백지화됐고, 2003년 7월 전북 부안군이 위도에 방폐장 유치 신청을 하며 확정 직전까지 갔지만 2년여에 걸친 반대가 폭력사태로까지 비화하며 또 무산됐다. 안전성에 대한 우려가 격렬한 반대를 부른 가장 큰 이유였다.
중ㆍ저준위를 다루는 경주 1단계 처분장도 당초 23개월이었던 공사기간이 두 차례에 걸쳐 48개월 늘어나며 우려를 키웠다. 일반 터널은 입구와 출구를 동시에 굴착해 지하수가 나와도 자연적으로 배수가 이뤄지지만 동굴 처분고는 입구만 있을 뿐 출구가 없어 별도의 양수 작업을 벌여야 했던 게 원인이다. 설계 때보다 암반도 약해 추가 지반 공사까지 진행되며 시간이 하염없이 흘렀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달 23일 산업통상자원부가 경주 방폐장 사업기간을 당초 같은 달 말에서 올해 연말로 6개월 연장하는 실시계획 변경 고시를 하자 환경단체 등의 우려는 더욱 커졌다. 원자력환경공단이 “공사는 완료됐지만 인허가 등 행정적인 처리 기간을 반영한 것”이라고 해명하며 서둘러 지하동굴을 공개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추진한 지 무려 28년 만에 중ㆍ저준위 방폐물 처분이 눈앞으로 다가왔어도 고준위 방폐물(사용 후 핵연료) 처분은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원전들의 저장용량이 70%를 넘겨 당장 2016년부터 고리 원전을 시작으로 잇따라 포화상태에 이르게 되지만 처리 방식에 대한 윤곽은 공론화위원회를 통해 올해 말에야 나올 예정이다. 방식이 결정되더라도 부지선정과 해당지역의 강한 반발, 공사 기간과 추가 변수 등을 감안하면 실제 처분 시점은 가늠하기 힘든 상황이다.
경주=글ㆍ사진 김창훈기자 ch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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