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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서른' 즈음에

입력
2014.07.13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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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즈음에'를 부른 故 김광석.
'서른 즈음에'를 부른 故 김광석.

짧은 시간에 짧은 분량의 부고 기사로 누군가의 생애를 복원한다는 게 과연 합당한지, 가능한 일이기나 한지 의문스러워질 때가 있다. 유명한 사람들도 공적인 이력의 어딘가에는 빈 자리가 늘 있다. 자료와 기사들로도 메워지지 않는 공백이다. 짧고 성근 나의 삶을 돌아보더라도, 스스로 설명할 수 없는 빈 시간들이 뭉텅뭉텅 드러난다. 그건 기록이나 기억력의 문제만은 아니다.

그 공백들은, 사소해서 잊혔거나 누락됐을 수도 있고, 뭔가가 거리껴져 적극적으로 감추거나 우회한 탓일 수도 있다. 사소하든 심각하든, 인간은 자신에게도 완벽히 솔직해질 수 없는 존재다. 객관적으로 자신을 판단하는 일은 더 힘들 것이다. 그러니 삶을 복원한다는 것은 석연찮은 공백들을 징검다리처럼 디디며 나아갈 수밖에 없는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시간은 잔인해서, 50년을 살든 100년을 살든 그 삶에 공백이란 없는 법이다.

공백의 앞뒤에 놓인 이력이 주인공의 삶의 맥락- 활동분야나 지향 등등-에서 사뭇 벗어난 듯 보일 때도 있다. 흔적으로는 추적할 수 없고 추정하기도 힘든 단절과 도약, 이를테면 삶의 단층 같은 공백이다. 그런 공백 앞에서는, 삶이 늘 이성적일 수 없고 상식적 추론으로 완벽하게 연역될 수 없는 것 아니냐고 얼버무리는 게 정직한 태도일 것이다.

하지만 시간의 기록에서 공백은 결핍이 아니라 결함이다. 특히 한 사람의 생애에서 아주 중요한, 체크포인트 같은 지점을 가로지르는 단층은 우회할 수 없는 난관이다. 그 때의 단층은 알리바이를 대지 못하는 피의자의 진술 같은 게 된다. 그래서 어떨 땐 어쩔 수 없이, 둔한 추론으로 그 균열을 메우기도 한다.

그건 어쩌면 모든 일상의 문제, 모두의 생애의 문제일 수 있다. 입사 지원서와 함께 이력서를 쓸 때, 혹은 낯선 이들 앞에서 자기소개라는 걸 해야 할 때, 우리는 자신의 삶의 공백 앞에서 난처해지곤 한다. 왜 이리 진학이 늦었나, 졸업은 또 왜, 그 나이 되도록 뭐했나, 군대는 왜 또…. 취업 면접관 앞에서라면, 또 어학연수나 인턴사원 체험처럼 상식이 요구하는 모범 답안이 없는 이라면 심문을 당하는 피의자처럼 느끼게 될 수도 있다. 입학- 졸업-(입대)- 취업- 결혼의 행로들이 나이와 함께 공식화한 사회에서, 그 공식을 벗어나는 것은 결핍이고 결함이다.

그래서 누구는, 적(籍)이라도 갖기 위해 대학원에 가고, 브로콜리너마저의 노래 ‘졸업’의 주인공들처럼 “그 어떤 신비로운 가능성도 희망도 찾지 못해 방황하던 청년들”은 “쫓기듯 어학연수”를 떠난다. 이력서에 공백을 안 남기기 위해서, 알리바이를 위해서다. 물론 그 알리바이는 취업을 앞둔 20대에게만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나잇값이라는 말처럼, 돈과 체면을 동조화한 이 사회가 나이를 근거로 뭔가를 요구하는 거의 모든 이데올로기(의 내면화)가 그 예일 것이다.

가수 김광석의 히트곡 ‘서른 즈음에’를 얼마 전 처음 들은 예순 즈음의 한 선배는 “그게 어떻게 서른 살의 감성일 수 있냐”며 노랫말의 잔망궂음을 꾸짖었다. 정년 없는 든든한 직장인인 그는, 적어도 마흔이나 쉰은 돼야 느낄 수 있는 감성, 또 감당하는 상황 아니냐고 따졌다. 나는 그 ‘서른’이 사회가 요구하는 첫 현장부재증명에 실패한 이들이 제 스산해진 삶을 돌이켜볼 수 있는 거리를 처음 확보하는 나이라고, 그건 생물학적 나이가 아니라 운명이나 삶의 어떤 국면과 관련된 상징적 나이라고 말했지만, 그가 수긍했는지 또 내 말이 옳은지 알 수 없다. 다만 그는 서른이 너무 어린(?) 나이라고 했고, 나는 ‘졸업’이란 노래를 들으며, 현실은 더 어려졌을 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하릴없이 내 나이를 떠올렸다.

스타벅스가 한국에 문을 연 지 올해로 15년이 됐고, 내겐 고무 패킹이 삭아 밀폐가 안 되는 15년 된 스타벅스 텀블러가 있다. 그걸로 커피를 마시며 김광석의 저 노래를 무던히도 듣던 때가 몇 살 무렵이었는지도 이젠 기억할 수 없다.

최윤필기자 proos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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