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서 처음으로 라면을 만든 ‘라면의 대부’전중윤 삼양식품 명예회장이 지난 10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5세.
11일 삼양식품에 따르면 강원 철원군 출신인 고인은 1960년대 초 남대문 시장을 지나가다 사람들이 한 그릇에 5원짜리 꿀꿀이죽을 사먹기 위해 길게 줄을 선 것을 보고 국내 식량 자급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다. 제일생명보험 사장을 지내다 1959년 일본 도쿄에서 라면을 처음 맛 본 이후 그는 일본에서 팔리는 10원짜리 라면을 보고 라면회사를 차려 식량문제를 해결하겠다고 결심, 1961년 삼양식품을 창업했다.
당시 주무부처인 상공부를 설득해 5만달러를 지원받아 일본으로 건너가 기계도입과 기술지원 약속을 받아내고, 5만달러 중 기계를 도입하고 남은 2만3,000달러를 다시 정부에 반납해 당시 상공부 공무원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그는 일본 묘조(明星) 식품에 한 달 가량 출근하며 라면 제조기술을 전수받았다. 처음에 묘조식품은 핵심기술인 스프 배합비율을 가르쳐주지 않다가 그의 열정에 감명받아 한국행 비행기에 오르기 직전에 배합비율을 알려준 것으로 전해진다. 이 같은 노력을 통해 고인은 1963년 9월 15일 국내 첫 라면인 10원짜리 ‘삼양라면’을 생산하면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라면 맛을 알게 했다.
삼양라면은 출시 6년 뒤인 1969년 업계 처음으로 베트남에 수출됐고 현재는 전 세계 60여 개국에서 판매되고 있다.
전 명예회장은 라면스프 재료와 유가공 식품 공급을 위해 1970년대 초 대관령 목장을 만들었고 이후 관광 단지로 개발했다. 1980년대 들어 고인은 라면 외에 스낵, 유가공, 식용유, 축산업, 농수산물 가공 등으로 업종을 다각화해 삼양식품을 종합식품기업으로 키웠다.
시련도 있었다. 1989년 말 ‘우지(牛脂) 파동’ 사건으로 당시 라면업계 2위였던 삼양식품이 라면에 비식용 소기름을 사용했다는 비난을 받으며 공장 가동을 중단해야만 했다. 8년 뒤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으나 뒤이어 찾아온 외환위기로 경영이 악화해 결국 1998년 초 삼양식품의 4개 계열사가 위기를 맞기도 했다. 고인은 2010년 3월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후 장남인 전인장 회장에게 경영권을 승계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이계순 여사와 장남 전인장 회장 등 2남 5녀가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20호실이며 영결식은 14일 강원 원주 우산동 삼양식품 원주공장에서 진행된다. 장지는 강원 평창군 삼양목장이다.
고은경기자 scoopk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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