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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의 대부, 삼양식품 창업주 전중윤 명예회장 별세

입력
2014.07.11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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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양식품 전중윤 명예회장.
삼양식품 전중윤 명예회장.

국내에서 처음으로 라면을 만든 ‘라면의 대부’전중윤 삼양식품 명예회장이 지난 10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5세.

11일 삼양식품에 따르면 강원 철원군 출신인 고인은 1960년대 초 남대문 시장을 지나가다 사람들이 한 그릇에 5원짜리 꿀꿀이죽을 사먹기 위해 길게 줄을 선 것을 보고 국내 식량 자급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다. 제일생명보험 사장을 지내다 1959년 일본 도쿄에서 라면을 처음 맛 본 이후 그는 일본에서 팔리는 10원짜리 라면을 보고 라면회사를 차려 식량문제를 해결하겠다고 결심, 1961년 삼양식품을 창업했다.

당시 주무부처인 상공부를 설득해 5만달러를 지원받아 일본으로 건너가 기계도입과 기술지원 약속을 받아내고, 5만달러 중 기계를 도입하고 남은 2만3,000달러를 다시 정부에 반납해 당시 상공부 공무원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그는 일본 묘조(明星) 식품에 한 달 가량 출근하며 라면 제조기술을 전수받았다. 처음에 묘조식품은 핵심기술인 스프 배합비율을 가르쳐주지 않다가 그의 열정에 감명받아 한국행 비행기에 오르기 직전에 배합비율을 알려준 것으로 전해진다. 이 같은 노력을 통해 고인은 1963년 9월 15일 국내 첫 라면인 10원짜리 ‘삼양라면’을 생산하면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라면 맛을 알게 했다.

1963년에 나온 최초의 삼양라면 디자인. 한국일보DB
1963년에 나온 최초의 삼양라면 디자인. 한국일보DB

삼양라면은 출시 6년 뒤인 1969년 업계 처음으로 베트남에 수출됐고 현재는 전 세계 60여 개국에서 판매되고 있다.

전 명예회장은 라면스프 재료와 유가공 식품 공급을 위해 1970년대 초 대관령 목장을 만들었고 이후 관광 단지로 개발했다. 1980년대 들어 고인은 라면 외에 스낵, 유가공, 식용유, 축산업, 농수산물 가공 등으로 업종을 다각화해 삼양식품을 종합식품기업으로 키웠다.

시련도 있었다. 1989년 말 ‘우지(牛脂) 파동’ 사건으로 당시 라면업계 2위였던 삼양식품이 라면에 비식용 소기름을 사용했다는 비난을 받으며 공장 가동을 중단해야만 했다. 8년 뒤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으나 뒤이어 찾아온 외환위기로 경영이 악화해 결국 1998년 초 삼양식품의 4개 계열사가 위기를 맞기도 했다. 고인은 2010년 3월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후 장남인 전인장 회장에게 경영권을 승계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오른쪽 첫번째)과 박근혜 대통령(오른쪽 둘째)이 1980년대 전중윤 명예회장의 안내를 받으며 공장을 둘러보고 있다. 삼양식품 제공
박정희 전 대통령(오른쪽 첫번째)과 박근혜 대통령(오른쪽 둘째)이 1980년대 전중윤 명예회장의 안내를 받으며 공장을 둘러보고 있다. 삼양식품 제공

유족으로는 부인 이계순 여사와 장남 전인장 회장 등 2남 5녀가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20호실이며 영결식은 14일 강원 원주 우산동 삼양식품 원주공장에서 진행된다. 장지는 강원 평창군 삼양목장이다.

고은경기자 scoopk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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