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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에세이]숲과 늪

입력
2014.07.11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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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 들어가면 행복하다. 북송 때의 화가 곽희(郭熙)는 ‘군자가 산수를 애호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 소양을 키울 수 있는 전원에 살고 싶기 때문’이라고 했다. 인간은 자연에 있을 때 가장 인간답다. 그러나 일상에서 그럴 수 없는 까닭에 집에 자연을 그린 그림이라도 걸어두고 간접적으로라도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송대 사대부들은 그렇게 뛰어난 산수화를 그리는 창작 과정을 수신을 위해 노력하는 과정으로 삼았고, 훌륭한 산수화를 감상함으로써 전원생활의 수신을 대신하고자 했던 것이다.

우리가 숲에서 거친 욕망을 내려놓고 침잠하며 행복한 것은 삶과 자연의 일치감을 느끼며 저절로 정화되기 때문일 것이다. 숲은 그 자체로 아름답고 위대하다. 거기에는 나름의 질서와 관계가 있다. 자연은 아무렇게나 있는 것 같지만 어느 하나 허투루 존재하는 것이 없다. 그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인들이 꿈꾸던 이상향은 숲을 뒤로 하고 적당히 담을 두른 정원과 집이었다. 그것이 바로 낙원이었다. 숲은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자연의 품이다. 그래서 인간은 숲을 꿈꾼다.

늪은 습지의 일종이며 일반적으로 수심 3㎙ 이하의 호수와 비슷한 물웅덩이이다. 축축한 진흙이 깊은 땅을 늪지대라고 한다. 늪은 생태의 보고이기도 하다. 그래서 예전과는 달리 늪은 새로운 가치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늪은 사람이 빠지면 헤어 나오지 못하는 두려움을 상징하기도 한다. 숲이 질서와 평화라면 늪은 무질서와 공포를 느끼게 한다.

파주 출판문화단지에 ‘지혜의 숲’이 생겼다. 수십 만 권의 책을 가득 담은 ‘신개념의 도서관’이라며 예찬이 이어진다. 그러나 정작 가본 그곳은 끔찍했다. 그것은 숲이 아니라 늪이었다. 다양한 생태의 보고인 늪이 아니라 무질서와 공포의 늪이다. 분류도 안 되고 사서도 없는 그곳을 어떻게 도서관이라 명명할 수 있는지 그 파렴치와 무지가 놀랍다. 도서관협회나 사서협회 등에서 그것을 ‘공식적으로’ 비난하지 않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언론들도 다투어 다루며 사람들에게 꼭 한 번 들러볼 만하다며 부추긴다. 물론 첫눈에 그게 근사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누구 말마따나 책더미를 아무렇게나 쌓아놓은 책무덤에 불과하거나 심지어 건물의 마감재로 쓰였을 뿐이다. 어떻게 그리도 책을, 그리고 도서관을 모독할 수 있는지 경악스럽다. 사진으로는 ‘멋’있는 풍경이 될지 모르겠지만 책의 ‘맛’은 도무지 느낄 수 없다. 높은 책장에 꽂힌 책들은 제목을 읽어내기도 어려운데 사서도 아니고 일종의 자원봉사자 같은 권독사라는 듣도 보도 못한 신업종을 두었지만 도대체 어디에 무슨 책이 있는지 알아야 찾아 줄 수 있지 않은가!

‘책의 해’에 그저 형식적인 행사 몇 개 치르며 이름값이나 내밀려던 사람들이 과연 무엇을 제대로 했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었는데, ‘지혜의 숲’이라는 해괴한 ‘늪’을 ‘창조’해낸 그 발상이 놀랍다. 게다가 거기에 세금이 수억 원 들어갔다 하니 그걸 끌어댄 사람이나 좋은 아이디어라며 그 돈 넙죽 내준 정부나 오십보백보다. 그런데 언론들까지 그 허위를 짚어내기는커녕 외려 감탄이나 질러대고 있으니 도대체 우리의 문화적 소양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부끄럽다. 정작 책의 맛은 보지 못하고 그저 멋있는 배경으로만 바라보며 식사하거나 차를 마시는 이 신종 레스토랑 혹은 카페에 가서 이리저리 각 재어가며 사진 찍는 것도 보기 민망하다. 책은 읽고 느끼고 성찰하며 삶으로 발화하는 것이지, 장식이나 멋이 아니다. 하물며 책을 만들어내고, 출판도시문화재단 이사장이라는 자리에 있는 이가 이런 희극을 벌였다는 것은 아연한 일이다. 물론 좋은 뜻으로 시작했을 수도 있고, 어설픈 문화 권력을 휘두른 신 사과일 수도 있을 것이다.

백번 양보해서 좋은 뜻으로, 오직 선의로 했다손 치더라도 늪을 숲이라 이름 붙인 것은 남세스럽고 대략난감한 소행이다. 더 늦기 전에 늪이 아니라 진짜 제대로 된 숲으로 고쳐야 한다. 그런데도 너 나 없이 오불관언이다. 생각하며 살기 참 어려운 일인가 보다.

김경집 인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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