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 '인천사태'수배자 검거 과정 공장취업 여대생 수사 빙자 성고문
87년 박종철 고문치사와 함께 5공화국 흉측한 민낯의 상징
당시 부천 지역엔 영세공장들 밀집, 인구 급증... 압축성장의 그늘 대변
지금은 주택가 '평화로운 관공서' 주민들 "시끄러웠던 사건"옅은 기억
왕복 8차로 경인로 위로 차들이 가득했다. 경기 부천시를 둘로 쪼개듯 관통하는 이 도로는 정체로 악명 높다. 인천과 서울을 잇는 18㎞ 남짓한 도로는 평일 낮에도 차량이 대열을 이뤄 신호를 따른다. 부천역을 지나 인천 방향으로 1㎞ 가량을 내달리다 좌회전을 했다. 골목이나 다름 없는 2차로 오르막이 이어졌다. 언덕배기를 향해 300m쯤 오르니 오른쪽으로 부천소사경찰서가 보였다. 낡은 다세대주택과 소규모 아파트 단지로 둘러싸인 주변은 적막을 형성했다. 과열한 엔진과 경적의 소음이 도로를 가득 채운 경인로의 분주함이 무색했다.
지상 4층의 부천소사경찰서 본관은 무표정했다. 낡은 몸 주변은 28년 전 정국을 흔들었던 사건의 진앙지로는 지나치다 싶게 한가로웠다. 점심을 먹기 위해 주차장으로 향하는 여경들의 가벼운 수다 위로 배달 오토바이의 분주한 경적이 포개졌다. 경찰서 건너편 보습학원과 어린이집은 관공서 주변이라기 보다 주택가로 이 지역을 규정했다.
압축성장의 명암, 부천
부천소사경찰서는 90만 도시 부천의 성장을 대변한다. 1982년 4월 30일 부천경찰서로 문을 열었다. 당시 부천시는 터질 듯 팽창하고 있었다. 73년 경기 부천군 소사읍이 부천시로 승격했을 때만 해도 인구는 6만5,080명이었다. 77년(13만8,061명) 갑절로 늘었고 82년 27만명에 이르렀다. 급증하는 치안 수요를 인천부평경찰서에만 기댈 수 없었다.
경제 개발에 따른 수도권 인구집중화가 부천을 신생 대도시로 키웠다. 서울 구로구와 맞닿고 인천 부평구와 이웃한 부천은 웃자라기 좋은 도시였다. 서울과 인천으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에게는 침실 역할을 했고 서울과 인천에 자리잡지 못한 영세사업자에게는 소규모 공장부지를 제공했다. 85년엔 인구 45만6,000명을 품으며 전국 10위권 도시로 급부상했다.
급성장은 부작용으로 이어졌다. 시민들은 돈이 모이면 서울로, 인천으로 둥지를 옮겼다. 영세기업이 몰려 있어 기업 부도가 다른 지역에 비해 많았다. 인근 인천보다 어음부도율이 2배 정도 높았다. 90년 기준 100명 이하 사업장이 전체의 90%를 차지했다. 기업이 영세하니 노동여건은 열악할 수 밖에 없었다. 서울에 비해 임금수준도 떨어졌다. 부천시는 고도성장의 길을 걸으며 강한 빛으로 진한 그림자를 드리웠던 한국 경제의 모순을 그대로 끌어안고 있었다.
그날의 ‘사건’은 필연처럼 터졌다. 부천이라는 공간이었기에, 폭압적 정권이 철권 통치했던 시대였기에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은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 80년대 초반 대학 운동권의 화두는 노동운동이었다. 노동현장 경험이 진보적인 사회운동을 위해 꼭 겪어야 할 요건으로 여겨졌다. 많은 대학생이 노동현장의 주역이 되기 위해 캠퍼스를 떠나 공장으로 향했다. 학생 출신 노동자(학출)였는데 정부는 이들을 ‘위장취업자’로 칭했다.
80년대 중반은 학출, 위장취업자의 정점이었다. 국회 보건사회위원회 회의록 등에 따르면 85년 4월 84명이었던 위장취업자가 86년 12월 699명으로 급증했다. 학출의 주요 목적지는 영세사업장이 몰린 경인지역이었다. 권인숙씨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서울대 가정대를 82년 입학한 그는 사회 현실에 눈을 뜬 뒤 학출의 길을 택했다. 86년 부천의 한 공장에 가명으로 취업해 위장취업자가 됐다. 신분 노출을 우려해 퇴사한 뒤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다 거주 지역 통장의 신고로 6월 검거됐다. 공문서위조혐의였다. 정국은 5ㆍ3 인천사태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경찰은 인천사태 수배자들을 쫓고 있었고 권씨의 관련 여부를 캐려 했다. 문귀동 경장이 조사를 맡았다. 수사를 빙자한 성고문이 이뤄졌다.
부도덕한 정권의 몰락 알려
묻힐 뻔한 권씨의 피해 사실은 곧 세상에 알려졌다. 권씨는 재야의 도움을 받아 7월3일 문 경장을 고문ㆍ강간 혐의로 인천지검에 고소했고 문 경장은 명예가 훼손됐다며 맞섰다. 사건 발생 한 달이 넘어 검찰은 “성적 모욕은 없고 폭행과 폭언만 있었을 뿐”이라고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공안당국은 “성을 혁명의 도구로 이용하는 운동권의 상투적 전술”이라며 권씨를 비판했다. 언론도 대부분 정부의 일방적인 발표를 받아쓰기 식으로 보도했다. 문 경장은 파면됐으나 정상 참작으로 기소유예 됐다. 반면 권씨는 공문서 변조와 사문서 위조로 1년6월 형을 선고 받았다. ‘관계기관회의’로 사건의 은폐ㆍ조작 시도가 있었다는 의혹이 제기됐으나 유야무야됐다.
민주화가 반전을 이끌었다.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은 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함께 5공화국 정권의 부도덕성을 상징하는 사건이 됐다. 두 사건은 87년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됐다. 권씨는 6월 항쟁 직후 가석방됐고 대법원은 89년 문씨의 혐의를 인정해 징역 5년 형을 선고했다. 김육훈 역사교육연구소장은 “정권이 80년대 민주화 운동을 사찰하고 탄압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라며 “국가권력이 국가폭력을 조직적으로 행사한 대표 사건”이라고 규정했다.
부천경찰서는 99년 6월 부천남부경찰서로 개명했다. 90년대 신도시 개발로 인구가 더 늘어 부천중부경찰서가 문을 열었기 때문이다. 도시가 부피를 키우면서 남부경찰서는 원미경찰서, 오정경찰서와 함께 부천 치안을 삼분하는 소사경찰서로 이름을 바꿨다. 부천시의 도심이 새 택지지구로 이동하면서 소사경찰서는 주택가에 파묻힌 ‘평화로운 관공서’가 됐다. 급성장한 부천의 이력만큼 부천경찰서의 부침도 유난했던 셈이다. 도시의 발달 덕분에 성고문사건과 짝을 이뤘던 부천경찰서란 불명예스러운 이름을 떼낸 것이 건물에게는 그나마 행운이라고 할까.
소사경찰서 맞은 편, 85년 문을 연 순대국밥집의 60대 여주인은 성고문 사건을 어슴푸레 기억했다. “그 때 시끄러운 사건이 있긴 했는데 워낙 오래됐고 관심도 없어 잘 알지 못한다”고 했다. 오래된 이발소에 들어가 주민에게 물어도 연신 손사래였다. 전직 경찰이 운영하는 주변 행정사 사무소에서도 비슷한 반응이 돌아왔다. 지난해 9월 기준 부천시의 인구는 88만2,555명. 대도시의 익명성은 28년 전의 떠들썩했던 현대사의 사건조차 그렇게 지우고 있었다.
부천=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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