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명보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이 2014 브라질 월드컵에서 1무 2패라는 21세기 한국 축구사상 최악의 월드컵 성적표를 들고 물러났다.
표면적인 사퇴 이유는 2014 브라질 월드컵 성적부진에 대한 책임이지만, 축구협회의 유임 결정 이후 불거진 월드컵 준비 기간 부동산 구매설과 브라질 현지 회식 동영상 유출로 인한 여론 악화가 결정적인 이유로 보인다.
2014 브라질월드컵 대표선수 선발 과정부터 논란이 많았다. 스스로 내세운 선수 선발 원칙을 깨가면서 박주영을 비롯한 2012 런던올림픽 멤버를 무리하게 기용해 '의리축구' 논란에 휩싸였다. 해당 선수들이 월드컵 본선 무대에서 부진한 모습을 보이자 이에 대한 책임론이 대두됐다. 세 경기를 치르면서 무색무취의 전술로 졸전을 벌인 데 대한 비판도 뒤따랐다.
못 한 건 사실이다. 재임 기간 동안의 A매치 성적은 19전 5승4무10패, 26.3%의 승률이다. 차범근(53.7%) 허정무(63.6%) 조광래(57.1%) 최강희(50%) 등 전임 감독들에 비해 크게 뒤처진다.
떠나는 홍명보를 향한 비판 여론이 무겁지만, 그가 한국 축구사에 남긴 발자취는 화려했고 의미 있었다. 홍명보는 고려대 재학 시절이던 1990년 국가대표에 처음으로 발탁된 후 2002 한·일 월드컵을 끝으로 은퇴 할 때까지 4차례의 월드컵에 출전했고, 총 135차례의 A매치에 나섰다.
첫 월드컵이었던 1994년 미국월드컵에서 스페인과 독일을 상대로 한 골 씩을 터뜨리며 이름을 날린 이 '겁 없는 청년'은 포항 스틸러스(당시 포항제철)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한 후 J리그에 진출했다. 가시와레이솔 시절엔 외국인, 특히 한국인에 대한 배척이 심했던 일본 무대에서 당당히 주장 완장을 찼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은 선수 인생의 정점이었다. 스페인과의 8강전, 4강행을 확정 짓는 마지막 승부차기를 성공시킨 후 두 팔을 활짝 편 채 미소 짓는 모습은 한국 축구사의 가장 화려했던 순간으로 기억된다. 은퇴 후에는 축구로 사랑을 나눠왔다. 자비를 털어 홍명보 장학재단을 설립, 2003년부터 매년 크리스마스 시즌마다 자선 축구대회를 개최해 희귀병을 앓는 어린이들을 도왔다.
▶[영상] 홍명보의 화려했던 선수시절
성인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기 전까지의 지도자 생활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실패가 없었다. 2009년 20세 이하 대표팀(U-20) 감독을 맡아 U-20 월드컵에서 구자철(마인츠), 홍정호(아우쿠스부르크), 김보경(카디프시티) 등을 이끌고 8강에 올랐고, 그 멤버들을 주축으로 짠 올림픽 대표팀을 이끌고 2012 런던올림픽 동메달을 차지했다.
이때까지의 흠 잡을 데 없는 업적에 축구팬들로부터 웬만한 잘못에는 비난을 면한다는 권리를 뜻하는 속어인‘까임방지권’을 얻었지만, 영원하진 않았다.
AS모나코(프랑스) 이적을 통해 사실상의 병역기피로 국민들로부터 지탄받았던 박주영을 끌어안았던 과정과 브라질 월드컵 대표팀 선발 과정에서 논란에 휩싸였고, 브라질 월드컵 졸전에 매서운 비난 여론과 맞섰다.
협회의 유임 결정으로 바닥으로 떨어진 명예를 회복할 기회를 얻는 듯했지만, 이후 불거진 논란으로 헌법보다 무섭다는 ‘국민정서법’의 심판을 받았다. 대표팀 감독 재임 기간동안 남긴 허물에 그동안 그가 남긴 수 많은 선물은 빠르게 잊혀졌다. 김형준기자 mediabo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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