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년 경력의 日 엘리트 판사
사법부 치부, 상명하복의 세계 폭로
대법원장 말이라면 구두 핥을 태세 헌법 수호보다 사건처리만 집중
결국 시민 피해
절망의 재판소
세기 히로시 지음ㆍ박현석 옮김
사과나무 발행/254쪽/1만5,000원
일본 전직 재판관이 사법부의 치부를 낱낱이 폭로한 책 ‘절망의 재판소’가 국내 번역됐다. 지난 3월 일본 출간 당시 폭발적인 반응을 끌어내며 논픽션 부문 베스트셀러에 오른 책이다. 저자인 세기 히로시 메이지대 교수는 일본 최고재판소(대법원) 조사관, 사무총국(법원행정처) 등을 거친 엘리트 재판관(판사)으로 33년간 일본 사법계에 몸 담아왔다.
그는 대중이 법원에 대해 가지고 있는 환상 ? 고집스럽고 융통성은 없지만 사회정의 구현에는 단호하리라는 ? 을 철저히 깨부수며 “대다수의 재판관에게 당신은 소송을 위한 메모의 한쪽 구석에 적힌 하나의 ‘기호’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세기 교수가 말하는 일본 사법계는 완벽한 상명하복의 세계로, 자신의 소신을 가지고 그것을 주장하는 재판관은 절대로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없다. 일례로 최고재판소가 암묵적으로 공인하고 있는 방향과 다른 판결을 내놓은 한 재판관은 실적이나 평판 모두 우수했는데도 먼 지방재판소의 소장으로 발령 받았다. “이는 일종의 본보기와 같은 인사인데 ‘사무총국의 방침에 이러쿵저러쿵 토를 달지 말고 군말 없이 복종하지 않으면 이렇게 된다’는 협박 효과는 매우 크다.” 한국의 법원행정처에 해당하는 사무총국의 총장은 최고재판소 장관(대법원장)으로 가는 가장 확실한 디딤돌이다. 저자에 따르면 사무총장은 “최고재판소 장관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듣고, 그 구두바닥이라도 핥을 만큼 뼛속까지 사법 관료가 아니면 절대로 임무를 수행할 수 없다.”
이 같은 시스템에 피해를 받는 건 당연히 무고한 시민들이다. 저자는 1993년 오키나와의 가데나 미군기지 소음 공해 소송을 예로 든다. 주민들이 낸 소음 금지 청구 소송에 대해 최고재판소가 내린 판결은 “미군의 비행은 국가의 지배가 미치지 못하는 제3자의 행위이기 때문에 국가에 금지를 요구하는 주장 자체가 부당하다”는 것이었다. 세기 교수는 “나무로 코를 꿰어두는 매정한 행위”라며 “애초에 미국과 미일 안보조약을 체결한 것은 국가였으며 국가가 미군의 비행을 허락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미국이 하는 일이기 때문에 국가에는 책임이 없다면 무엇 때문에 헌법이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식민지와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저자의 노골적인 폭로는 헌법을 수호하는 주체인 사법부에 대한 일말의 신뢰까지 깡그리 무너뜨린다. “일본 재판소의 관심은 ‘사건 처리’에 집중돼 있다. 빨리 요령껏 사건을 처리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권력이나 정치가, 대기업도 그것을 바라고 있다. 서민의 사소한 사건, 분쟁 따위는 한시라도 빨리 끝내는 것이 가장 좋으며, 그보다는 전체로서의 질서유지, 사회 안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중략) 일본의 재판소는 그런 의미에서, 즉 ‘국민을 어리석은 대로 내버려둔 채 지배해 나간다’는 의미에서는 매우 모범적인 재판소인 것이다.”
이 같은 현상이 비단 일본의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은 국내 독자들에게도 깊은 울림을 남긴다.
황수현기자 so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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