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클라우드 아틀라스’에서 선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삶은 우리 것이 아닙니다. 자궁에서 무덤까지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의존합니다.” 맞는 말이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심지어는 죽음 뒤까지 남의 손과 수고가 필요하다. 일상 속에서도 매 순간 타인과의 관계에 의해 먹고 자고 입고 이동할 수 있다. 아프거나 궁지에 몰리면 강도는 더 강해진다.
예전에 만났던 어느 노인은 사람에 대한 혐오가 대단했다. 자신이 개와 고양이를 잔뜩 키우는 이유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보다 훨씬 나아. 거짓말도 안하고 뒤통수도 안치거든.” 동족혐오로 인해 수시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던 노인은 그러나 혼자 떨어져 살고 있지 않았다. 이웃 욕을 하면서도 바득바득 마을에 붙어살았다. 미움보다 외로움이 더 컸다. 우리는 혼자서 살 수 없는 인종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도움과 소통, 연대 같은 양질의 덕목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반대현상도 그만큼 꼭 있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다음 내가 사는 섬마을은 한마디로 뒤집어졌다. 당장 관광객 예약이 줄줄이 취소돼서 식당과 숙박업소가 울상이었다. 또 있다. 사건이 생기면 모든 게 이른바 에프엠대로 바뀐다. 필드 매뉴얼은 꼬박꼬박 실천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처음부터 함께 지켜왔다면 쉽지 않다는 생각 안 든다. 공직자와 정치인의 부패와 무능이 ‘대충의 생활화’를 선도해 왔으며 이런 경우가 생기면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국민들에게 강요하는 호들갑을 오래 전부터 봐왔다.
이익을 보고 있는 집단은 책임을 안 진다. 이번 참사에도 청와대, 안전행정부, 해수부, 해경이 순서대로 빠져나갔으며 걸린 것은 언딘이며 책임 진 사람은 단원고 교감 단 한 명이라는 말이 떠도는 이유이기도 하다. ‘조선공사 사흘’ 이라는 말이 조선시대부터 있었다. 스스로도 지키지 못할 법률을 왜 이렇게 잔뜩 만들어 놓았는지. 법이 많으면 선진국이라는 명제는 없다. 결국 문제는 개인의 소양이니까. 되레 법이 많으면 그만큼 교묘하게 나쁜 짓 하는 사람이 많았다는 이야기가 되어 버린다.
우리 섬에 두 개 선사의 여객선이 들어왔는데 그 중 하나가 청해진 해운이었다. 청해진 소속 배는 더 이상 운항을 하지 않는다. 여객선이 두 척에서 한 척으로 줄어든 것이다. 청해진 해운 거문도 소장이었던 선배와 소속 선원들은 모두 실업자가 되었다. 한 선원은 밀린 월급 받아내기 위해 서류를 만들던데 받아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청해진의 전신이 세모해운이었다. 내 외삼촌은 세모해운 소속 선장이셨는데 월급으로 스쿠알렌을 받아와서 한숨짓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 이상한 알약을 먹든지 아니면 팔아서 월급을 대신하라고 했던 것이다.
그 동안 주민들이 운항과 관련해 불편을 호소하면 청해진 해운에서는 “어차피 적자노선이다” “차라리 배를 빼고 싶다”라고 답하곤 했다. 협박에 가까웠는데 사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타는 사람들과 기름값, 선원들 수를 대충 따져보면 그렇게 적자가 날 것 같지 않았던 것이다. 이번에 처음 알았다. 유병언 일가가 배 이름까지 상표등록을 해놓아서(그들이 보유한 상표권이 무려 1,376개라고 한다) 출항 때마다 적잖은 돈을 받아 챙겼다는 것을. 세월호만 해도 한번 출항에 100만원씩 가로채 갔다는 것을. 그렇게 상표권 사용료 명목으로 계열사로부터 챙긴 돈이 1,000억원 이상이며 고문료 명목으로도 매달 1,500만원씩 연간 1억8,000만원을 받아온 사실까지. 그러니 회사직원 입에서 적자운운 나왔던 것이다.
그들 일가는 상표저작권 법을 근거로 가만히 앉아서 치부를 했다. 수많은 법률 중에 그들이 지킨 유일한 법이었을 것이다. 그 외의 것은 그저 종이에 적혀있는 검정글자였다. 어떻게 준법을 이렇게 자신에게 이익되는 한 가지만 골라 잘 지킬 수 있을까. 내 주변 사람들은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법률이 있는지도 모른 채 살고 있는데 말이다. 하지만 이번 사태가 나기 전까지 상당수 사람들은 그런 짓을 능력이라고 하고 똑똑하다고까지 칭송했었다.
한창훈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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