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견 작가 이승우 신작 소설집 출간
자기 집 다락방에 세들어 살고 기약 없는 비자에 속은 타들어 가는데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부조리 외면하는 인간 군상 해부
이렇게 억울하고 분할 데가 없다. Y는 도시의 소란을 미워하고 전원의 한적함을 앙망하는 천상 양반이라는 것 외엔 죄가 없다. 그가 아껴 모은 돈으로 7년에 걸쳐 완공한 양평의 전원주택이 푸른 잔디밭과 정자, 연못을 가로지르는 반달형의 나무다리를 갖추고 있는 것도 진부한 취향이란 조롱은 들을지언정 비난 받을 일은 결코 아니다. 그러니 Y가 입주 직전 아프리카 지사장으로 발령 받은 것도, 3년 후 돌아와보니 집이 낯 모르는 사람의 손에 넘어간 것도, 푸른 잔디밭이 잿빛 연탄밭으로 변한 것도, 물 빠진 연못이 오리 우리로 변한 것도 명백히 억울하고 부당한 일이다.
Y가 집을 비운 동안 종종 들러 집을 봐주기로 한 이웃 장팔식은 집을 전세 3,500만원에 넘기고 종적을 감춰버렸다. 새 입주자는 장팔식을 데려오라며 계약서를 팔랑거린다. 남은 임차기간은 1년 9개월.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소매를 걷어 부치고 무례한 입주자 놈과 한판 붙을까, 아니면 그깟 돈 시원하게 줘버리고 엉망이 된 집을 보수하는 데 주력할까. 그러나 힘도 없고 돈도 없다면…아니 생각해보면 아주 최악의 상황은 아니지 않은가. 집이 아예 넘어간 것도 아니고 복구할 수 없도록 파손된 것도 아니다. 세상이 완전히 뒤집힌 게 아니라 살짝 기울어 어지러운 정도라면 내가 몸을 반대로 기울여 중심을 잡으면 되지 않을까.
Y는 하루에 만원의 숙박비를 내고 자기 집 다락방에 세를 든다. 그리고 연못에 물을 채우고 잔디밭의 연탄재들을 걷어낸다. 마치 집을 되찾는 것보다 집을 보수하는 게 더 중요한 일인 양, 집의 외관을 회복하면 집도 되찾을 수 있을 것처럼.
중견 작가 이승우의 신작 소설집 ‘신중한 사람’이 나왔다. 스토리텔러가 아닌 소설가의 작품을 읽는 일은 늘 부담과 흥분을 동시에 가져온다. 그들이 재미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는 것보다 읽는 이의 내면에 메스를 들이대는 쪽에 더 흥미를 보일 것이란 추측 때문이다. 책에는 억울한 중년남성 Y의 이야기를 다룬 ‘신중한 사람’과 제10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작인 ‘칼’을 포함해 8편의 소설이 들어 있다. 각기 다른 시점에 다른 매체에서 발표했음에도 불구하고 작품들은 마치 하나의 소설집으로 묶일 것을 예상하고 쓴 듯 매우 닮아 있다.
소설가, 전과자, 일용직 노동자로 설정된 등장인물들의 공통점은 억울한 상황에 처한다는 것이다. 작가는 법에 호소하기엔 애매한 크기의 폭력을 정교하게 창조한 뒤 그 안에 인물들을 밀어 넣어 반응을 기록한다. ‘어디에도 없는’의 주인공 유가 싸우는 대상은 기약 없는 비자다. “어떨 땐 빨리 나오고 어떨 때 늦게 나오는지 가늠할 수 없어요. 어떨 때는 두 주 만에도 나오고 어떨 때는 두 달이 되어도 안 나오고 그래요.”
빚더미에 올라 파산 직전인 유는 외국에 자리잡은 외삼촌으로부터 일자리를 제안 받고 비자를 신청하지만 3주면 될 거라는 비자센터 직원의 말과 달리 비자는 나오지 않는다. 경솔하게도 미리 월셋방을 처분하고 항공권까지 예매해버린 유는 가슴이 닳아 없어질 지경이지만 비자센터는 발급은 자신의 소관이 아니라는 말만 기계처럼 되풀이한다. 이때 유의 머릿속엔 다음과 같은 계산기가 돌아간다. “빠르면 두 주, 늦어도 두 달…그리하여 두 개의 숫자는 시작점과 도착점을 표시하는 깃발이 되었다. 두 주 이전에는 닫혀 있다가(어떤 경우에도 두 주 이전일 수는 없다), 두 주부터 두 달까지만 열려 있고, 두 달째 되는 날 다시 닫힌다(어떤 경우에도 두 달을 넘어갈 수는 없다). 아무리 늦어도, 어쨌든 두 달 안에 모든 것이 해결된다. 그럴 수 밖에 없다. 그래야 한다.”
세상의 자잘한 폭력 속에서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믿고 싶은 대로 믿어버리는 인간의 모습은 결코 낯설지 않다. 세상은 우리를 속이되 사지를 부러뜨리진 않고 우리는 세상을 뒤집는 대신 스스로를 속인다. 절망이 축적돼 망상의 인간이 탄생하는 순간, 관찰자들은 야유를 보내야 할지 연민을 표해야 할지 판단하지 못하고 멈칫거리게 된다.
황수현기자 so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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