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악의 폭정 국가라는 북한 사회가 이러지 않을까 싶네요.”
서울의 한 사립대 대학원에 재학 중인 A씨는 지난해만 떠올리면 아직도 머리가 지끈거린다. 당시 음대 행정조교로 들어간 A씨의 근무 시간은 오전 9시30부터 오후 5시30분까지. 하지만 퇴근 시간은 자정을 넘기기 일쑤였다. 담당 교수가 저녁이 다 돼서야 출근을 하는 탓이다. 이 때부터 그는 학과 회의, 사무 보조, 교수 심부름 등 온갖 허드렛일을 도맡아 처리했다. 물론 연장 근무에 따른 초과수당은 없었다. 100만원 안팎에 불과한 월 급여가 전부였다. 생활비를 보충하려 아르바이트로 일했던 몇몇 레슨도 모두 떨어져 나갔다.
교수의 한 마디, 한마디는 곧 법이었다. 교수가 출ㆍ퇴근할 때마다 연구실에 올라가 인사를 하고, 자잘한 시중을 드는 이른바 ‘가방 모찌’ 업무는 기본. 퇴근 시간 후에도 장보기를 대행하거나 교수 집안의 대소사까지 챙겨야 했다. 하루는 사흘은 족히 걸릴 음악용 컴퓨터 교체작업을 하루에 끝내라는 지시에 새벽 3시30분까지 기기와 씨름했다. 교수는 외부인 앞에선 더 심하게 행동했다. “똑바로 안 해?”라는 말을 이유 없이 내뱉으며 위세를 맘껏 즐겼다.
과중한 업무와 정신적 압박감에 기본 계약기간인 1년을 채우는 조교들은 드물었다. 남몰래 벽을 치며 눈물짓는 동료도 여럿 봤다. ‘폭력 없는 폭력의 먹이 사슬’. A씨가 6개월 동안 체득한 대학사회의 민낯이다. 그는 9일 “입시생 사이에 암암리에 교수에 대한 소문이 퍼져 우리 학교를 기피하는 현상까지 벌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전근대적인 사제 관계는 우리나라 대학의 경쟁력을 좀 먹는 대표적 병폐 중 하나다. 지난해 카이스트가 대학원생들을 상대로 한 연구환경 실태 조사에서도 응답자들은 연구 어려움(44.4%) 다음으로 과도한 업무(16.8%)와 교수와의 관계(13.9%)를 스트레스의 주원인으로 꼽았다.
특히 A씨처럼 도제식 교육 시스템이 강고한 예ㆍ체능계 학생들은 도가 지나친 주종(主從)관계 때문에 중도 포기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지난해 서울의 한 여대 음대를 졸업한 B씨는 1학년 때 이미 꿈을 접었다. B씨는 가을 열리는 정기 연주회 연습을 이유로 전 학년 재학생이 참석하는 여름캠프 합숙을 강요 받았다. 개인사정으로 참석을 못해도 회비 5만원은 부담해야 했다. 교수의 최대 무기는 성적이었다. 참여 성실도를 전공점수에 반영했기에 교수의 요구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B씨는 “음대생들은 진로의 문이 좁아 경쟁이 치열한데다 예중-예고-예대로 이어지는 확고한 커넥션을 형성하고 있어 교수의 눈밖에 나면 도태되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 지적했다.
제자를 학문의 동반자가 아닌 개인의 부속물쯤으로 치부하는 교수들의 그릇된 인식은 결국 취업과 맞닿아 있다. 서울의 한 사립대 경영대학원의 C 교수는 제자를 머슴부리듯 혹사시키는 걸로 악명이 높다. 공짜로 아들 개인과외 시키기, 아들 과제ㆍ경시대회 준비 대신해 주기, 부인 도서 대출 떠넘기기, 졸업생 통해 최저환율로 환전하기, 항공기 좌석 업그레이드하기 등 편법을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다. 그럼에도 학생들의 문제제기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C 교수가 그 분야에서 꽤 명망 있는 인사로 통하기 때문이다. 2012년 C 교수 밑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한 D씨는 “C 교수가 따오는 외부 프로젝트에서 좋은 성과를 낸 뒤 기업체의 눈에 띄어 취직하는 사례가 종종 있었다”며 “지도교수의 가르침이 인생 전체를 좌우한다고 보면 된다”고 단언했다.
성희롱조차 범죄라는 인식 없이 자행하는 교수들도 있다. 수도권의 무도계열 학과를 중퇴한 E씨는 3년 전 과 커플인 남자친구와 지도교수 연구실을 방문했던 경험을 잊을 수 없다. 교수는 다짜고짜 “진도는 어디까지 나갔느냐” “여자가 남자를 리드해야 한다” 등 성관계 질문을 집요하게 퍼부으며 E씨를 곤란하게 만들었고, 그는 당시 충격으로 1년 뒤 학교를 그만뒀다. E씨는 “성희롱에 대한 법적 잣대는 갈수록 엄격해지는데 유독 대학만은 성역으로 남아 있다”고 말했다. 해당 교수는 지금도 대학이라는 울타리에 기대 아무 거리낌 없이 말의 폭력을 계속하고 있다.
김이삭기자 hiro@hk.co.kr
권재희기자 ludens@hk.co.kr
임준섭기자 ljscogg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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