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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판 새긴 선국암에선 신선들의 수담 꽃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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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판 새긴 선국암에선 신선들의 수담 꽃피고…

입력
2014.07.09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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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류봉을 오르던 등산객이 갈은구곡 제9곡 선국암(仙局巖)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신선이 바둑을 두었다는 바위 위에는 희미하게 바둑판 자국이 남아 있다. 혹시라도 바위가 스러질세라 어느 등산객이 장난 삼아 괴어놓은 나무 작대기에 해학이 묻어난다.
옥류봉을 오르던 등산객이 갈은구곡 제9곡 선국암(仙局巖)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신선이 바둑을 두었다는 바위 위에는 희미하게 바둑판 자국이 남아 있다. 혹시라도 바위가 스러질세라 어느 등산객이 장난 삼아 괴어놓은 나무 작대기에 해학이 묻어난다.
산막이옛길 탐방객들이 산책로 초입 소나무동산에서 그네를 타며 휴식하고 있다.
산막이옛길 탐방객들이 산책로 초입 소나무동산에서 그네를 타며 휴식하고 있다.
산막이옛길은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산책로 곳곳에 상상력을 덧씌워 걷는 재미를 더하고 있다. 최고 난코스(?)인 40계단은 ‘마흔고개’로 이름지었다.
산막이옛길은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산책로 곳곳에 상상력을 덧씌워 걷는 재미를 더하고 있다. 최고 난코스(?)인 40계단은 ‘마흔고개’로 이름지었다.
갈론마을 주민이 갈은구곡에 놓아 두었던 토종벌 통을 메고 귀가하고 있다.
갈론마을 주민이 갈은구곡에 놓아 두었던 토종벌 통을 메고 귀가하고 있다.

산(山)으로 끝나는 지명은 수두룩하지만 충북 괴산(槐山)만큼 이름값 하는 지명이 또 있을까?

경북 문경과 경계를 이루는 조령산을 포함해 괴산군청에서 등산코스로 소개하는 산과 봉우리만 35개다. 아무 산이나 끌어 붙인 게 아니다. 대부분 600m~1,000m를 넘나드는 고봉이다. 산이 많은 만큼 이름난 계곡도 많다. 구곡(九曲)이라고 이름 붙은 곳이 전국에 60여개인데 이중 7곳이 괴산에 있다. 제주 올레길 이후 지자체마다 우후죽순으로 걷기 좋은 길을 만들어 홍보하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요즘 가장 뜨는 곳 중 하나가 괴산의 ‘산막이옛길’이다. 산막이옛길이 궁벽한 산촌사람들의 가난과 땀이 밴 길이라면 인근 갈은구곡은 양반의 멋과 여유가 넘치는 계곡이다. 같은 곳 다른 느낌, 괴산 칠성면의 산막이옛길과 갈은구곡을 다녀왔다.

아기자기한 이야기로 덧칠한 산막이옛길

산막이옛길은 괴산군 칠성면 외사리 사오랑마을과 사은리 산막이마을을 연결하는 4km 길이의 오솔길이었다. 1957년 최초로 순수 우리기술로 만들어진 괴산댐이 완공된 이후 흔적만 남았던 길을 정비해 2011년 개장했다. “옛날 움막에서 사기그릇을 구웠다고 해서 산막이라고도 했다는데 그건 지어내기 좋아하는 사람들 얘기지. 산으로 콱 막혀 있어서 산막이여”아랫마을 외사리에 사는 노진규(79) 어른의 설명이다.

아닌게아니라 이 마을은 삼면이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괴산호 유람선 매표소 직원 양우석(74)씨가 기억하는 산막이마을은 20여 호나 살던 제법 큰 마을이었다. “고욤과 대추를 줍거나 나무하러 다니던 곳이었죠. 절구에 고욤을 찧어 큰 항아리에 담아 놨다가 한겨울에 먹는 맛이 참 좋았지요” 댐이 생긴 후 나룻배로 외부와 겨우 연결되던 산막이마을은 3가구까지 줄었다가 옛길이 정비되고 관광객이 늘면서 지금은 11가구까지 늘었다. 귀촌한 이들 대부분은 음식점과 카페를 운영한다.

산막이옛길이 인기를 끄는 가장 큰 이유는 오솔길 곳곳에 심어놓은 이야기와 상상력 덕분이다. 이를테면 허리 높이에서 살짝 구부러져 사람의 손길을 많이 탄 나무는 ‘미녀 엉덩이 참나무’가 되고, 백설기 모양의 두꺼운 바위가 차곡차곡 쌓인 단층은 ‘스핑크스 바위’가 되는 식이다. 한 사람이 겨우 비를 피할 만한 바위 아래 공간은‘여우비 바위굴’이 되고, 그것보다 조금 깊은 동굴은 ‘호랑이 굴’이 되었다. 무거운 지게를 잠시 내리고 목을 축인 옹달샘은 ‘노루샘’, 쌀 한 말 건지기도 힘든 천수답 논배미에는 연을 심어 ‘연화담’으로 이름 붙였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에 발랄하게 상상력만 불어 넣은 것이다.

놀이공원의 요소를 더한 것도 재미를 더한다. 에두르는 작은 골짜기엔 ‘소나무 출렁다리’로 지름길을 내고, 전망대는 호수 가장자리 바로 위까지 빼내 시원하게 괴산호를 조망할 수 있게 했다. 가파른 경사면을 따라 위험스럽게 이어진 구간에는 대부분 안전 난간을 갖춘 데크를 깔아 걷기에 부담이 없다. ‘마흔 고개’라고 이름 붙인 40개의 계단을 오르는 것이 가장 난코스(?)다. 산막이 마을까지 갔던 길을 되짚어도 되지만 대부분은 유람선을 타고 되돌아 나온다. 여성과 아이를 동반한 가족들이 많이 찾는 이유이기도 하다.

요즘은 산꼭대기에서 보이는 맞은편 지형이 한반도를 닮았다고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다. 그것도 조금 억지스러운데 동해 위치가 되는 습지에 울릉도와 독도를 표시한다며 인공섬을 만들었다. 모든 것이 자연에 녹아드는 산막이길에서 눈에 띄게 거슬린다. 과유불급은 딱 이럴 때 쓰는 말이겠다. 힘들이지 않고 쪽빛 호수를 끼고 숲 트레킹을 즐기면서 아기자기한 재미를 만끽할 수 있는 것이 산막이 옛길의 매력이다.

아껴 두고 싶은, 풍류가 깃든 갈은구곡

조금이라도 사람의 손길이 덜 탄 자연을 느끼고 싶다면 근처의 갈은구곡이 좋겠다.(3곡까지는 갈론계곡으로 부르기도 한다)

구곡(九曲)이라면 중국 송나라의 주자가 기거한 무이산을 연상하고 당연히 빼어난 산과 계곡을 떠올리겠지만, 아홉 굽이를 꿰어 맞추다 보면 과장이 있게 마련이다. 갈은구곡은 웅장함 보다는 오히려 소박함이 돋보이는 계곡이다. 물길에 닳아 자리하나 깔 수 있는 반질반질한 바위와 병풍으로 삼을 크지 않은 바위가 둘러쳐진 그 지점이 바로 한 굽이(曲)이다. 그 굽이마다 장암석실(場巖石室)·갈천정(葛天亭)·강선대(降僊臺)·옥류벽(玉溜霹)·금병(錦屛)·구암(龜巖)·고송유수재(古松流水齋)·칠학동천(七鶴洞天)·선국암(仙局巖) 등 멋들어진 이름을 붙이고 시를 새겼다.

‘…이 세상에 신선을 본 사람이 몇이나 될까? 참 이상도하지 여기에 찾아온 사람은, 가슴속 깨끗해져 절로 속된 마음 사라진다네’신선이 내려온 곳이라는 3곡 강선암에 새긴 시는 이곳에 오면 누구나 마음까지 맑아져 신선이 된다는 뜻이겠다.

9곡 선국암은 신선놀음의 절정이다. ‘옥류봉 산마루에 해가 기울어 바둑을 끝내지 못하고…다음날 다시 와보니 알알이 (바둑)돌 위에 꽃이 피었네’아래로는 시원한 계곡물이 흐르고, 위로는 늘어진 가지가 그늘을 만든 널찍한 바위에 앉아 바둑을 두는 모습이 절로 그려진다. 여기에 오늘 못하면 내일 하면 된다는 여유까지 곁들여지면 그 누군들 신선이 되지 못할까? 실제 선국암 바위에는 어렴풋이 바둑판이 새겨져 있다. 혹시라도 스러질까 작은 나뭇가지로 선국암 큰 바위를 괸 어느 등산객의 장난에 슬며시 미소를 머금는다.

빼어난 경치에 붙는 팔경(八景)과 달리 그저 맑은 물 한 굽이 돌아가는 소소한 풍경 속에서 시 한 수로 세상 이치를 관통하는 선비정신이 묻어나는 곳 그곳이 갈은구곡이다. 지금이야 어림도 없는 행위지만 바위에 새긴 글자 하나하나까지 물소리 바람소리와 어우러져 자연이 되어버린 곳, 인위적인 것이라곤 좁은 등산로 밖에 없어 괴산 사람들도 외부에 알리지 않고 아껴 두고 싶은 곳, 갈은구곡은 그런 곳이다.

갈은구곡은 괴산호를 사이에 두고 산막이 마을 맞은편 갈론마을에서 시작하는 옥류봉 등산로에 있다. 3곡까지는 시멘트 포장이 된 평탄한 길이다. 계곡도 제법 넓어 물과 길이 만나는 굽이마다 여남은 사람은 않아 쉴 수 있을 만큼 널찍한 바위가 자리잡고 있다. 3곡부터 9곡까지는 본격적인 등산로다. 미리 겁먹을 필요는 없다. 약 20분이면 충분하다. 크게 가파르지도 않아 노약자가 아니라면 힘들이지 않고 다녀올 수 있다. 등산로는 때로는 왼편으로 때로는 오른편으로 계곡을 끼고 이어져 지루하지 않다. 계곡에 발을 담그는 것까지는 괜찮겠지만 속리산국립공원 지역으로 야영은 금지다. 갈은구곡에 대한 안내판은 갈론마을 끝자락 계곡 입구에만 있다. 바위에 새긴 풍류의 흔적을 차례로 찾아보는 것이 갈은구곡의 재미다. 눈 여겨 보지 않으면 지나치기 쉽다.

괴산=최흥수기자 choisso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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