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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사내가 건너가려던 저 편 언덕, 분명 아름다울 것이다

입력
2014.07.09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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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한나라에 대항한 志士이건 시대 바뀌어 권위 잃은 무당이건

이 편서 한탄하는 사람들 실패담은 다른 삶도 가능하다는 강력한 증거

번역 거치고 詩語로 다듬어지며 강한 암시의 힘과 고결한 울림 실려

옛날 북녘 나루터에서 머리털이 하얗게 샌 미친 남자가 술병을 들고 무모하게 강을 건너다 물에 빠져 죽었다. 그를 만류하던 그의 아내도 그가 죽자 슬픈 노래를 부르고 스스로 몸을 물에 던져 죽었다. 뱃사공 곽리자고가 그 장면을 목격했고, 그 목격담을 들은 사공의 아내 여옥은 광인의 아내가 불렀을 애처로운 노래를 악기 공후의 가락에 실어 불렀다. 이 노래 ‘공무도하가’의 배경설화는 슬픈 이야기지만, 널리 알려지고 자주 들은 이야기라서 그 슬픔이 묽어지기도 했다. 4언4구의 한시로 채록되어 중국의 옛 문헌에 소개되었다가 다시 한국의 여러 문헌에 실리게 되었다는 이 노래를 김인환 교수의 번역을 앞세워 싣는다.

님은 그 물 건너지 마오 公無渡河

님은 그예 건너시었네 公竟渡河

물에 빠져 시어지시니 墮河而死

님을 장차 어이하올꼬 當奈公何

우리는 학창시절 이 감동스러운 노래와 설화를 들으며 이런저런 의문이 없지 않았지만 옛 이야기나 옛 노래가 다 그렇다는 생각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백수광부는 단지 술에 취한 것일까 정말로 미친 것일까. 그는 왜 물을 건너려 했을까. 목격자인 곽리자고는 뱃사공이었다는데 왜 두 사람의 죽음을 보고만 있었을까. 공후 같은 고급 악기를 뱃사공의 아내가 지니거나 연주할 수 있었을까. 이런 의문을 우리는 소홀하게 넘겼지만 전문연구자들까지 그럴 수는 없었다.

김인환 교수는 지금은 폐간된 잡지 ‘포에지’에 한국의 고전시가에 관한 글을 연재하면서, 이 ‘공무도하가’의 연구사를 요약하는 말로 그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혔다. 인용이 조금 길어지겠다.

“술에 취한 사내는 한나라의 식민통치에 저항한 독립지사라는 해석이 있었다. 고구려의 적극적인 압박(AD23)이 시작되기 훨씬 전에 토호인 왕조(王調)의 반항 운동이 7년이나 계속되었으며, 그 후에도 토착 사회의 반란이 끊이지 않았다. 그는 권위를 잃은 무당이라는 해석도 있었다. 유학에 기반을 둔 중국식 통치 질서가 무당을 배격하자 그는 죽음을 선택했으며 그의 아내도 슬픈 감정을 즉시 굿노래 가락에 얹어 넋두리로 부를 수 있는 무당이었다는 것이다. 어떤 학자는 이야기 전부를 곽리자고의 허구적 창작이라고 해석하였다. 뱃사공이 일의 피로를 덜기 위하여 이야기 한 머리를 꾸며내어 여옥에게 들려주었다는 것도 있음직하지 않은 일은 아니다. 텔레비전 앞에 수동적인 바보로 앉아 있는 우리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겠지만, 바로 얼마 전만 하여도 농민은 음악의 소비자가 아니라 생산자였다. 여옥이 뜯었다는 공후는 후대의 스물 세 줄짜리 공후가 아니라 일곱 줄로 된 민속악기였을 것이다.”

김 교수는 이런 해석 가운데 어느 쪽도 편들지 않았다. 다만 “이 배경 설화가 노래의 탄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확실하다고 했다. 설화의 중심선이 “어디까지나 여옥이 노래를 부르게 되는 지점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곽리자고는 여옥이 노래할 수 있도록 그에 적합한 상황과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으며, 두 남녀의 죽음은 노래를 완성할 수 있도록 여옥의 상상력에 충격을 준 소재라고 설명했다. “하나의 노래가 이 세상에 나오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이 설화를 통해 헤아려 볼 수 있다고도 했다. 이 신중하면서도 현명한 설명은 전문가가 아니기에 크게 책망당할 일이 없는 나 같은 사람에게 훨씬 더 무모한 생각을 품게도 한다. 사람들은 배경설화를 통해 이 노래를 설명하려고 하지만, 어쩌면 옛날 중국인들이 조선에서 흘러 들어온 이 노래를 설명하기 위한 이런 설화를 거꾸로 꾸며낸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다.

한편으로 나는 ‘공무도하가’에 생각이 미칠 때마다, 내 동무들이 어린 시절 냇가에서 잠자리를 잡으며 부르던 노래가 떠오른다. 잠자리들이 떼지어 나는 물가에서, 아이들은 왕잠자리 암컷을 실에 매달아 머리 위로 띄어 올리고, 때로는 쉽게 잡히지 않는 암컷 대신 수컷에 호박꽃가루를 발라 암컷으로 속이고, 수컷들이 그 암컷 또는 가짜 암컷에 달라붙기를 기다리며 이렇게 노래 불렀다.

잠자리야 잠자리야 물 건너지 말아라

물 건너다 맥빠지면 물에 빠져 너 죽는다

물에 빠져 너 죽으면 늙은 에미 어찌 사나

높임말 대신 반말을 쓰고, 과거시제 하나를 가정표현으로 바꾸면 저 여옥의 노래와 잠자리 동요는 얼추 같은 것이 된다. 그렇다고 내가 상상력을 폭넓게 자극하는 ‘공무도하가’의 뿌리를 이런 회유와 협박의 주술 노래에서 찾겠다고 하면 백수광부보다 더 무모한 사람이 되겠지만, 이 동요도 한문이나 다른 외국어로 번역되었더라면, 공후를 켜고 불러야 할 노래 못지않게 강한 암시의 힘과 고결한 울림을 얻었을 것이며, 그래서 고전이 지닌 보편성의 위의를 갖추기도 하였을 것이라고는 백 번이라도 말할 수 있다. 번역의 힘이 바로 그런 것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외국 사람은 우리의 문학작품을 제 나라 말로 번역하겠지만, 우리는 외국어로 쓰인 작품을 우리의 모국어로 번역한다. 이때 모국어는 모국어이면서 동시에 모국어를 넘어서서 어떤 보편언어의 성격을 지닌다. 보편언어라는 말이 조금 불편할 수도 있겠다. 이런 예를 들자. 지금 한국에서도 크게 인기를 끌고 있는 미국 드라마 ‘왕좌의 게임’은 가상의 시간에 가상의 땅에 할거하는 중세풍의 일곱 개 국가와 몇몇 하위 국가들이 그 연맹국가인 칠왕국의 통치권을 놓고 치르는 길고 복잡한 전쟁을 소재로 삼고 있다. 그 가상의 일곱 나라는 하나의 공용어를 사용한다. 드라마가 미국 드라마인 만큼 그 공용어를 영어가 대신하고 있지만, 이때 영어는 저 가상언어에 대한 ‘영어 더빙’’의 성격에서 벗어날 수 없다. 영어로 대체되는 저 언어는 일곱 왕국이 서로 소통하는 언어일 뿐만 아니라 그 가상의 시대 가상의 땅과 우리 시대 우리의 땅을 연결하는 언어라는 점에서 보편적 성격을 지닌다. 이때 드라마에서 어쩔 수 없이 영어로 표현되는 보편성은 모든 언어에 내재하는 보편성이라고 말해야 한다.

언어가 저마다 그 보편성을 가장 용이하면서도 강렬하게 드러내는 것은 그것이 번역어가 될 때이다.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를 한국어로 번역했을 때 왜 프랑스 여자인 보바리 부인이 한국어로 말할 것이며,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한국어로 번역했을 때, 왜 덴마크 왕자가 한국어로 말할 것인가. 이때 한국어는 그 주인공들이 한 시대의 프랑스어나 덴마크어나 영어가 아닌 어떤 가상의 보편언어로 말했을 때의 그 보편언어를 대신하는 말이다. 그래서 한국어로 된 이 번역 언어는 프랑스어와 덴마크어와 영어를 넘어설 뿐 아니라 한국어를 또한 넘어선다. 보편언어라는 생각 자체가 바로 거기서 출발한다. 문학의 언어는, 특히 시의 언어는 현실의 비천함이 어떠하건 거기에 위엄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우리가 번역어에서 발견하는 것과 동일한 보편성을 지닌다.

보편성은 특수한 사정에 매달리지 않는다. 우리가 어린 시절 잠자리를 호리기 위해 불렀던 노래가 어떤 다른 언어로 번역되어, 저 ‘공무도하가’ 못지않게 강한 암시의 힘과 고결한 울림을 얻고, 그래서 고전이 지닌 보편성의 위의를 갖추게 된다면, 그것은 우리 어린 시절의 땟물 흐르던 가난이 번역을 통해 정제되었거나 가려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번역어의 보편성이 우리의 현실을 배반하고 허위의 현실을 그 위에 덧씌운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가난했던 현실 한 가닥 한 가닥이 저 고전적 위의와 연결될 수 있고, 저 보편적인 것의 고결한 울림 속에 우리의 땟물이 고스란히 내장될 수 있음을 번역과 번역어가 특별한 방식으로 일깨워준다는 뜻이다.

백수광부는 아내의 만류를 뿌리치고 물을 건넜으며, 우리가 노리던 잠자리들도 대개는 우리의 회유와 공갈을 무시하거나 알아듣지 못하고 냇가 저편 언덕으로 날아갔다. 어쩌면 문학은 붙잡는 사람과 뿌리치고 떠나는 사람의 이야기로 시작하고 끝난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한쪽에는 이렇게라도 살아야 한다는 사람이 있고, 다른 쪽에는 이렇게 밖에는 살 수 없는지 제 눈으로 직접 알아보아야겠다는 사람이 있다. 어떤 시인은 제 고향보다 처음 보는 땅을 더 친근한 시선으로 그렸고, 어떤 시인은 미지의 밑바닥까지 새로운 것을 찾기 위해 잠겨들겠다고 했다. 그것은 죽음 속에 뛰어들겠다는 말과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나 저편 언덕도 이편 언덕에서 출발해야 하니, 이편 언덕이 있어야 저편 언덕이 있다. 잠자리 노래가 있어야 ‘공무도하가’도 있다는 뜻이다. 물 건너지 말라는 아이들의 협박은 물을 건너지 못하는 모든 사람들의 한탄일 수 있으며, 한탄하는 사람들의 실패담은 또 하나의 삶이 가능하다는 강력한 증거일 수 있다. 그래서 또 하나의 세계가 지녔을 아름다움과 질서를 이 세상의 불결함과 혼란보다 더 잘 증명해주는 것은 없다. 문학은 그 증명의 절차를 번역이라고 부른다.

고려대 명예교수ㆍ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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