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이즈미 내각 납치자 협상 파탄이
북 미사일발사ㆍ핵실험으로 이어져
북일 접근을 북핵 해결에 활용해야
잘하면 상을 주고 잘못하면 벌을 주는 게 채찍과 당근 전략이다. 어떤 대상을 원하는 방향으로 변화시키고자 할 때 쓴다. 일본 고이즈미 내각 시절 북일 납치자 문제 협상은 이 단순한 상식에 부합하지 않았다. 일본인 납치를 극구 부인하던 김정일 정권이 극비 물밑협상 끝에 마침내 납치 사실을 인정하고 생존자 5명의 일시 귀국을 허용했다. 일본측은 당초 약속을 어기고 일시 귀국한 납치자들을 돌려보내지 않았다. 우여곡절을 거쳐 이들 가족의 귀국까지 성사시켰다.
속셈이야 무엇이었든 김정일 정권으로서는 국가적 범죄를 좀처럼 인정하지 않는 국제정치 상례에 비춰 매우 이례적으로 착한 행위를 한 만큼 당연히 상당한 당근을 기대했다. 그러나 당근은커녕 북한정권 출범 이래 일본으로부터 가장 혹독한 채찍이 가해졌다. 김정일의 광폭정치라고 치켜세웠던 납치자 문제 인정 전에 비해 북일 관계는 훨씬 나빠졌다. 북한정권의 주요 돈줄이던 조총련계 송금이 차단되고, 인적 물적 교류도 거의 끊기다시피 했다.
북일 납치자 협상이 파탄에 빠진 2006년 7월 북한은 장거리 탄도미사일인 대포동 2호를 발사했다. 2002년 9월 고이즈미 방북 때 채택한 북일 평양선언은 탄도미사일 발사 유예를 포함하고 있었다. 이게 휴지조각이 된 것이다. 납치자 문제 해결을 통한 북일 국교정상화를 정권의 주요 동력으로 삼았던 고이즈미 총리 내각도 수명을 다했다. 고이즈미 내각 시기 납치자 협상을 추적한 후나바시 요이치 전 아사히신문 대기자는 미사일 발사는 고이즈미 실각에 대한 북한의 ‘조포’(弔砲)였다고 썼다.
대북 강경파 아베 신조가 고이즈미 내각을 이어받았다. 고이즈미의 1차 평양방문을 수행했지만 대북 경제제재와 무력행사를 포함한 강경대응을 주장해 고이즈미의 발목을 잡았던 그다. 아베 내각이 출범한 지 20일이 안된 2006년 10월 9일 북한은 그들 식 환영행사를 했다. 바로 1차 핵실험이었다.
북한의 핵실험 배경을 한마디로 말하기는 어렵다. 일부에서는 핵개발은 북한정권의 일관된 목표라고 본다. 그러나 2000년 1차 남북정상회담 이후 전개된 전반적인 상황은 핵을 협상카드로 삼아 외부로부터 체제보장과 경제지원을 얻어내는 게 김정일 정권의 ‘플랜A’였음을 뒷받침한다. 그게 어느 순간 핵개발을 본격화하는 ‘플랜B’로 바뀌었다. 여기에는 일본에서 거세게 일어난 납치자 문제 역풍도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후나바시 요이치도 1차 북 핵실험 막전막후를 다룬 책 김정일 최후의 도박의 에필로그에서 같은 논지를 편다.
다시 일본의 내각을 이끌게 된 아베 총리가 납치자 문제 해결 등 대북 접근에 적극 나서고 있는 상황은 아이러니다. 국내 정치적 목적 외에도 역사문제를 고리로 대일 공동전선을 형성한 한국과 중국을 겨냥한 측면이 강하다. 북한은 최근 관계가 소원해진 중국에 시위하고 좀처럼 관계개선의 여지를 보이지 않은 남한을 압박하고자 하는 데서 아베 정부와 이해관계가 잘 맞아떨어진 것 같다.
고이즈미의 납치자 문제 해결 노력은 당시 김대중ㆍ노무현 정부의 적극적 지지를 받았다. 반면 지금 아베 내각의 납치자 문제 접근은 한국 정부는 물론 중국과 미국의 강한 의구심을 사고 있다. 북한의 핵 및 미사일 문제에 아무 진전이 없는 상태에서 독자적 대북제제 해제 등 일본의 대북 단독플레이는 대북 국제공조체제를 무너뜨리는 행위라고 걱정과 불만이 이만저만 아니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보자. 자신들의 핵 포기는 “실현될 수 없는 개꿈”이라고 버티는 북한이다. 궁극적인 북핵 해결을 위해서는 북한을 가둘 수 있는 강력한 틀을 만들어야 한다. 그 틀은 북일, 북미수교를 필요로 한다. 목하 진행 중인 북일 접근은 잘만 하면 두 나라의 의사와 상관 없이 북핵 문제 해결로 가는 과정으로 활용할 수 있다. 다만 상황을 그렇게 이끌어갈 비전과 외교적 리더십이 필요하다. 박근혜 정부에는 기대하기 어려운 꿈일까.
거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아베 정부의 납치자 협상이 엉뚱하게 북한의 4차 핵실험 빌미가 되지는 않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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