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의제 민주주의는 최고집행권자가 주권자인 국민에게 책임져야 한다는 확고한 인식을 가질 때 정상적으로 작동된다. 최소정의적 관점에서 절차적 민주주의의 확립은 필요조건일 뿐이다. 절차적 정당성을 획득하고 대통령에 선출된 것이 국민으로부터 제약받지 않는 권력을 위임받은 것으로 생각하는 순간 ‘정치’가 아닌 ‘통치’가 시작된다. 직접선출이 자의적인 권력행사를 추인한 것이 아님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책임정치의 부재는 정치의 실종을 가져오고, 정치가 사라진 공간에는 통치가 자리한다. 통치에서 국민은 시혜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왕조시대의 유물이다.
여기에 ‘위임 민주주의’의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위임 민주주의는 주로 신생 민주주의 국가에서 발견된다. 국민의 직접선출에 의해 탄생한 권력이 자신에게 모든 권력이 위임된 것으로 간주하고 유권자에 책임을 지지 않는 후진적 통치 현상을 일컫는다. 이는 책임정치의 실종으로 연결된다. 현대정치에서 대표성과 책임성은 대의제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양대 축이다. 대통령제는 유권자의 직접선거에 의해 선출된 최고집행권력이 국민에 대해 책임지는 권력구조다. 그래서 대통령 책임제라고 한다. 집권세력은 선출해준 유권자들에게 수직적 책임을 져야 한다. 대통령제에서 책임은 여론과 공론에 의해 형성된 사회적 합의를 따르는 것이다.
4월 27일 정홍원 총리의 사의표명은 세월호 참사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한 정부가 국민에게 책임지는 정치과정의 일환이었다. 그리고 안대희씨와 문창극씨 두 총리 후보의 자진 사퇴 이후 정총리가 유임됐다. 정홍원 총리의 유임이 ‘국정공백의 장기화를 방치할 수 없고, 새 후보자가 청문회의 벽을 통과하기가 쉽지 않다’는 현실적 이유로 그 불가피성이 수용될 수 있다고 치자. 그렇다고 해도 총리의 사의 표명이 국민에 대한 책임의 의미였을진대 유임 이후의 국민에 대한 책임 부분은 여전히 남는다. 정 총리의 사의 표명이 단순히 정국의 반전을 꾀하려는 과거의 총리 경질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그만큼 국민에 대한 책임을 무겁게 받아들였다는 의미다.
정 총리의 유임이 현실론에 입각한 고육지책이었다면 이를 정당화할 수 있는 명분이 있어야 한다. 고육지계(苦肉之計)의 사전적 의미는 적을 속이려고 자신의 희생을 무릅쓰는 것이다. 후한말 오나라 군대와 유비군의 연합군의 황개가 자신을 희생해 조조를 속이고 연합군의 승리를 이끌었다는 적벽대전의 고사에서 유래한 고육지책은 자신의 뼈를 깎는 아픔이 전제될 때 성립한다.
따라서 정 총리의 유임을 ‘국정공백의 최소화나 청문회의 벽이 높다’는 명분으로만 합리화하려 한다면 이는 국민은 안중에도 없는 전형적인 위임 민주주의의 행태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어떤 정치적 행동이 ‘제 살을 깎는’ 고육(苦肉)인지를 보여주지 않고는 정 총리의 유임은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할 수 없다. 단순히 정 총리의 유임을 반대하는 논리와는 차원이 다르다. 총리의 사의표명과 유임의 인과관계에 대해 최소한의 논리적 또는 형식적 인과관계에 대한 설명이 있어야 하는 이유다. 유임 이후 박근혜 대통령이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신상털기”와 “여론재판”을 언급한 것은 그래서 뜬금없다.
국민에 대한 책임은 공약의 시행에서 출발해야 한다. 공약이 사후의 상황 논리에 따라 수정 또는 불가피하게 폐기될 수 있다 하더라도 이는 국민에게 명시적으로 설명하고, 설득하고, 사과하는 절차와 함께 국민의 동의와 양해가 전제될 때 정당화될 수 있다. 이런 과정과 여론ㆍ공론에 의한 사회적 합의가 생략된 공약의 파기나 수정은 민주주의의 퇴행과 지체를 결과한다.
정 총리가 사의를 표명하고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인다고 했다. 그리고 사태 수습 후 사표를 수리한다고 했다. 이것도 공약이다. 선거 때 약속만이 공약이 아니다. 더구나 이는 국민이 엄중한 책임을 물은 것에 대한 화답이었다. 그러나 공약도 책임도 지켜지지 않았다. 그리고 여권은 같은 목소리로 청문회 제도 개선을 들고 나왔다. 이렇게 논의의 층위가 다를 수 있는가. 이렇게 정치언어와 문법이 불통일 수 있을까. 5월 19일 대통령의 ‘눈물의 담화’에서 약속한 ‘국가 대개조’는 책임정치의 엄중함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한다.
최창렬 용인대 교양학부 정치학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