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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도] 너무나 쉽게, 지나치게 빠른

입력
2014.07.07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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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동남아의 한 휴양지를 찾은 적이 있다. 숙소 식당에서 아침을 먹으려는데 한 한국남자가 식당 종업원을 채근하는 소리가 들렸다. “빨리, 빨리!” 그는 음식 접대가 늦는다며 비하 어린 한국말로 종업원을 하대했다. 동행에게 던지는 말도 들렸다. “국민이 저렇게 게으르니까 국가가 가난하지.” 낯이 확 달아올랐다. 종업원이 한국어를 못 알아들었기를 간절히 바랐다.

서두름에 대한 한국인의 유난한 집착을 최근 택시 안에서도 겪었다. 월드컵 축구 한국 국가대표팀의 무기력한 16강 좌절에 초로의 기사는 분통을 터트렸다. “아니 외국 애들은 허파가 두 개 달렸어? 왜 이기질 못해?” 축구 문화와 전통을 들먹이자 그는 “10년 정도면 극복할 수 있는 일 아니냐”고 반문했다. 100년 안팎으로 축구가 삶의 일부가 된 유럽이나 중남미 국가의 실력도 우리 특유의 집중력으로 따라잡을 때가 되지 않았냐는 의미였다. 기사의 말에서 ‘빨리 빨리’ 심리의 바탕에 ‘할 수 있다’ 정신이 깔려있음을 깨달았다.

한국의 ‘빨리 빨리’ 문화는 긍정적인 평가와 부정적인 시선이 따른다. 대체로 긍정이 부정을 앞지른다. ‘빨리 빨리’는 곧잘 근면의 동의어로 통해왔다. 짧은 시간에 이룬 고속성장은 다 서둘러 무언가를 끝내는 우리의 습성이 바탕이 됐다는 것이다. 보릿고개를 벗어나 고층아파트에서 부른 배를 두드릴 수 있게 된 데는 ‘빨리 빨리’를 바탕으로 한 치열한 경쟁과 성취 욕구 덕이라는 평도 많다. 5년은 족히 걸릴 다리 건설도 3년 만에 해내는 ‘특수한 능력’은 우리의 저력으로 곧잘 해석됐다. 그럼에도 무엇이든 예정된 기간 보다 앞당겨 만들어내야 한다는 조급증은 우리 사회를 바닥부터 부실하게 만들었다. 물론 소수 의견 취급을 받는 인식이지만 말이다.

몇 년 전까지 장을 보기 위해 종종 들르던 대형 마트가 있다. 3년 전에 발길을 끊었다. 안전사고로 네 명이 세상을 떠난 뒤부터다. 한 명은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려다 횡사했다. 안타까운 죽음 때문에만 해당 마트를 멀리한 게 아니었다. 슬픔이 가시기도 전 너무 쉽게, 지나치게 빨리 정상영업을 재개하는 모습을 보고나니 해당 마트로 영 마음이 가지 않았다.

거주하는 도시의 시외버스터미널에선 지난 5월 대형 화재가 발생했다. 8명이나 목숨을 잃었다. 사고가 발생하고 사흘 뒤 버스터미널은 다시 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 정상영업을 하는 해당 건물을 지나칠 때마다 씁쓸하다. 안타까운 죽음이 너무나 쉽게 잊히는 듯해 마음이 무겁다.

지난해 10월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은 이탈리아 다큐멘터리 감독 지안프란코 로시는 한국과의 슬픈 인연을 소개했다. 그는 1994년 한 영상축제의 초청으로 서울을 첫 방문했다. 김포공항에 행사 관계자가 마중을 나오기로 했으나 아무도 그를 반기지 않았다. 그는 초행길에 간신히 행사 사무국에 도착했다. 성수대교 붕괴사고로 축제 관계자들 몇몇이 목숨을 잃었다는 말을 들었다. 로시 감독은 첫 방한 기간 중 “너무나 어렵고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 토로했다. 로시 감독의 회고를 들으며 성수대교 붕괴사고 같은 일은 이젠 우리와 무관한 비극이라는 무심한 생각이 들었다. 근거 없는 확신이었다.

‘빨리 빨리’ 문화는 우리의 행동에만 적용되진 않는다. 생활 태도와 정신에도 스며들어있다. 어떤 사고가 발생하면 재발 방지를 다짐하면서도 금세 잊는다. 또 다른 대형 사고가 일어나 이전 사고를 덮는 악순환의 반복도 문제지만 뭐든 빠르게 처리하는 습성도 사고 재발에 한 몫 해왔다.

히말라야에 산다는 전설의 할단 새는 밤새 추위에 떨며 다짐한다고 한다. 내일은 반드시 추위를 피할 둥지를 짓겠다고. 그러나 아침이면 굳은 각오는 따스한 햇살에 매번 녹아 사라진다. 할단 새의 저주 받을 망각은 지금 이곳 우리에게도 적용된다. 벌써 세월호에 대한 국정조사가 정쟁으로 변질될 조짐이다. 또 너무나 쉽게, 지나치게 빨리 잊힐까 두렵다. 세월호 참사엔 ‘빨리 빨리’의 부정적 습성이 작용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라제기 문화부 기자 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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