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순명 개인전 '스펙터클의 여백'
사건 현장서 모은 물건 이어 붙이고 흰 고래를 91개 캔버스에 그리고
실존ㆍ진실에 대해 의문 던져
의자 위에 천으로 덮어 씌운 울퉁불퉁한 입체가 올려져 있다.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는 알 수 없다. 천에는 돌무더기 같기도 하고 솜뭉치 같기도 한 형상이 그려져 있다. 이 작품의 제목은‘메모리스케이프-서울’이다. 왜 서울인지 짐작할 단서는 없다. 그러나 분명히 서울이다. 재개발로 철거가 한창인 서울의 한 동네에서 주워온 잡동사니들을 얼기설기 엮어서 입체를 만들고 천을 씌워 현장의 한 부분을 그렸다. 그때 그곳의 사건과 풍경을 기억하는 작가 나름의 방식인 셈인데, 구체적 맥락을 없애버린 게 특징이다.
경기 파주의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에서 열리고 있는 미술작가 홍순명의 개인전 ‘스펙터클의 여백’에 나온 작품들은 대체로 불친절하다. 하나의 장면에서 잘려나간 불완전한 풍경이거나 아무 설명 없이 끊어진 이야기로 다가온다. 설명이나 소통을 거부하는 듯한 이 작품들은 보는 방식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보는 것은 과연 보는 것인가. 있는 것들은 어떻게 실존하는가. 없는 것은 정말 없는 것인가.
이번 전시는 그가 10년 전부터 해온 풍경화 연작 ‘사이드스케이프’, 사고 현장에서 수집한 물건들을 오브제로 만든 신작 ‘메모리스케이프’, 똑 같은 규격의 수십 개 캔버스가 모여 하나의 작품을 이루는 최근작 ‘아쿠아리움’을 선보이고 있다.
‘사이드스케이프’, 즉 곁에 있는 풍경은 풍경의 일부이지만 눈에 띄지 않은 풍경에 작가가 붙인 이름이다. 전쟁이나 재난, 사건, 사고를 찍은 보도사진에 들어 있던 놓친 풍경을 그렸다. 작가는 누구나 주목하는 스펙터클이 아니라 스펙터클의 이면에 있던 것을 화면 중앙으로 끌어내 드러낸다. ‘칸다하르 2009년 4월 2일’은 아프가니스탄 대통령 선거 당시 탈레반의 공격 현장을 담은 보도사진 한 귀퉁이에서 찾아낸 피라미드를 흐릿하게 그린 것이다. 끔찍한 사건 현장과는 무관해 보이는 피라미드가 아무런 목적 없이 그냥 있을 뿐인 독립적 존재로 실존한다. 있는 줄도 몰랐던 것을 스스로 존재하게 만드는 이러한 방식은 어떤 의미나 해석이 있어야 비로소 존재한다는 통념을 단숨에 뒤집는다. 서울, 마르세유, 베를린, 워싱턴 등 도시 이름이 붙은 사이드스케이프 연작들이 그 도시와 무관해 보이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 보면 전혀 이상하지 않다.
‘메모리스케이프’ 연작은 스스로 존재하는 실존의 방식을 다룬다는 점에서 사이드스케이프의 연장선에 있다. 서울의 재개발 공사장, 밀양의 송전탑 반대 시위나 여수의 기름 유출 사고, 포천의 포격 연습장 폭발 사고 등의 현장에서 쓰레기처럼 나뒹구는 물건들을 수집해서 만든 오브제에 그곳의 지명을 붙여 놨지만, 특정 지역을 떠올릴 실마리는 보이지 않는다. 작품 제목으로 지명에 병기한 날짜만이 그때 거기에 그것이 있었다고 증언한다.
보는 행위와 보이는 것을 의심하는 작가의 태도는 비교적 친절해 보이는 최근작 ‘아쿠아리움’에서도 여전하다. ‘아쿠아리움 1402’는 그가 직접 촬영한 여수 아쿠아리움의 흰 고래 한 마리를 같은 크기의 캔버스 91개에 나눠 담은 그림이다. 캔버스 하나만 빠져도 고래는 보이지 않는다. 작가는 인공의 물을 거대한 바다인 양 헤엄치는 조각난 한 마리의 고래처럼, 우리가 안다고 믿는 진실도 실은 수많은 조각들이며, 그것들이 모여 하나의 현실을 만든다고 말한다.
그는 “단 하나의 고정된 리얼리티는 없다. 견고하고 단단한 것에는 거짓이 있기 마련”이라고 말한다. 애매하고 어설퍼 보이는 이미지를 고집하는 작업이 의도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정답을 가르쳐주는 직접적 소통은 예술의 방식이 아니다. 그로 인해 소통에 실패할 수도 있지만,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게 예술이다. 대중화를 앞세운 쉬운 예술은 예술의 자멸을 부를 뿐이다. 한두 명이라도 내 작업에 관심을 갖고 내 방식을 이해하려고 다가온다면, 그게 성공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전시는 8월 28일까지 한다.
오미환기자 mhoh@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