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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에세이]슈만의 코다, 닫힌 회상에서 열린 현재로

입력
2014.07.04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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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만의 피아노 4중주 ‘안단테 칸타빌레’ 악장을 오디오에 물리며 누군가 낮게 읊조렸다. “피아노는 이런 소릴 낼 수 없지. 현악기여서 가능해.” 핏기를 잃은 현악기의 울림이 한숨을 토하듯 바닥으로 털썩 내려앉자 바이올린 선율이 중력을 거스르며 포르타멘토(Portamento)로 떠올랐다. 단 세 마디의 짧은 도입부였지만, 앞으로 눈물샘을 단속해야 할지 모른다는 본능적인 방어기제가 발동했다.

서주는 심장을 어루만지는 첼로 선율로 이어진다. 누군가 다시 말했다. “이 음악을 들을 땐 중년의 여인이 떠올라. 빛 바랜 사랑을 쓸쓸히 회상하는 장면처럼…” 나는 첼로의 애절한 토로가 자칫하면 신파로 흘러 넘칠지 모른다고 우려했다. 슈만은 이 짤막한 한 문장에 7도 음정을 두 번이나 포함시켰다. 선율작법에 있어 ‘7도’는 감정의 불안한 동요를 의미한다. 마치 밀물과 썰물처럼 감정의 파고가 크게 일렁거렸다. 바이올린이 한 옥타브를 높여 이 파고를 이어 받자, 나무의 울림이 자아내는 호소력은 한층 더 고양됐다. 이때 피아노의 역할이 중요하다. 피아노의 잔잔한 반복음과 부드럽게 에워싼 화성은 현악기의 절박한 토로가 신파로 매몰되지 않도록 의연히 중화시켜주기 때문이다. 감정은 고양될지라도 난파되지 않아야 한다.

폐부를 찌르는 듯한 현악기의 직접적인 호소력에 비하면, 피아노는 중성적이고 객관적인 목소리를 지닌 악기이다. 슈만은 앞서 전개된 주선율을 피아노의 목소리에 최적화시켜 변형한다. 리듬은 엇박으로 해체되고 음정의 폭도 점진적으로 움직이는데, 심장을 톡톡 건드리는 듯한 피아노의 선율은 한곳에 머물지 못한 채 부유하고 방황한다. 이때 비올라의 중음역이 목소리를 덧대어 피아노를 돕는다. 여인의 쓸쓸한 ‘현재’가 현악기로 표현되었다면, 피아노가 바통을 이어받는 이 부분은 여인이 애절히 회상하는 찬란한 ‘과거’일 듯도 하다.

‘안단테 칸타빌레’ 악장의 구조는 A-B-A'라는 전형적인 세 부분 형식(ternary form)의 골격을 지니고 있다. A로 둘러싸인 B부분은 피아노와 현악기 공히 차분한 호흡으로 전개된다. 선율의 수직적 굴곡보다는 화성의 완만한 수평에 기대어 음악을 이어 가는데, A가 인간의 감정을 깊숙이 들춰내 보였다면, B는 자연의 풍광을 멀리 관조하는 듯한 양상이다. 그 공간적 거리를 널찍이 떼어 놓기 위해 작곡가는 조성을 선택하는데 과감한 결정을 서슴지 않았다. 플렛이 두 개 붙은 내림 나장조의 A부분은 돌연, 플렛이 여섯 개 붙은 내림 사장조의 B부분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기존의 관성을 흐트러뜨린 작곡가의 실험정신은 연주자와 감상자에게 날 것과 같이 생생한 일탈을 경험하게 한다. 음악은 다시 A'로 이어진다. A'는 초장에 등장했던 A와 똑같은 외양이 아니다. B의 시공간을 거치며 한 살 더 나이를 먹은 듯 성숙한 셈이다. 중년 여인의 토로는 화려한 음형으로 몸집을 불린다. 쓸쓸한 체념으로 퇴락하지 않기 위해 부산히 기운을 내보이지만, 그 파닥거림이 애틋하다. 흑백사진과 같던 회상은 감정의 파고를 넘나들며 총천연색 찬란한 빛으로 반짝인다.

이제 여인의 애절한 사연을 마무리 할 차례이다. 음악용어로는 이러한 종결구를 ‘코다’(Coda)라 부른다. 슈만은 통상적인 코다로 수렴하지 않는다. 이제껏 들려준 궤적과는 달리 전혀 새로운 재료를 등장시키며 음색적인 실험을 감행하는 것이다. 게다가 이 실험은 음악의 뿌리라 할 ‘배음’(Overtone)의 원리를 십분 활용하고 있다. ‘배음’이란 한 음을 연주한다 해도 홀로 울리지 않으며, 실제로는 여러 음이 함께 공명하는 음악의 기본 원리를 일컫는다. 피아노가 음의 뿌리(기음)를 울리자, 공기 중에 숨어있던 공명음들이 현악기에 의해 차례차례 모습을 드러낸다. 개인적으로는 전 악장을 통틀어 가장 매력적인 악절로 꼽는 순간이다. 여인의 회상은 배음의 마법으로 인해 과거의 굴레로부터 자유로이 풀려났다. 닫힌 회상이 아니라 열린 현재로 남겨둔 작곡가의 음악적 역량은 언제 들어도, 언제 연주해도, 늘 탄성을 자아낸다.

조은아 피아니스트·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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