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홍원 총리 재임명 명분 설명하고
청와대 속 ‘이상한 권력’ 배제하여
권한과 책임 뚜렷한 총리 만들어야
내각 재정비가 급하다. 박근혜 대통령은 세월호 참사 한 달 후인 5월 19일 ‘눈물의 대국민 담화’에서 국가개조를 약속했다. 관(官)피아 척결, 잘못된 적폐 해소, 비정상의 정상화 등 화두를 제공했다. 국가개조를 추진할 주체로서 ‘명실상부한 총리실’을 제시했다. 정홍원 총리가 이미 사의를 표명한 상황이어서 국민은 대선 당시 박 대통령의 중요한 공약이었던 책임총리제도 실현을 기대했다.
며칠 뒤 안대희씨가 새로운 총리후보자로 지명됐다. “국민의 높은 신망을 받아온 인물로서 국가안전시스템 혁신, 비정상적인 관행의 정상화, 엄정한 법질서 확립, 공직사회 개혁에 필요한 능력을 갖추고 있다.” 대통령이 국회에 제출한 임명동의 요청사유서를 접한 국민은 그를 자연스럽게 ‘책임총리 후보자’로 받아들였다. 안 후보자도 “국가가 바른 길, 정상적인 길을 가도록 대통령께 가감 없이 진언하도록 하겠다”고 말해 ‘책임총리 역할’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검사ㆍ대법관 출신인 안 후보자가 2012년 대선 당시 정치쇄신특별위원장을 맡아 책임총리 공약을 만들었고, 박 대통령이 힘주어 발표한 약속이었다.
박 대통령은 문창극씨를 다시 총리후보자로 발표했다. 중앙일보 주필을 역임했던 문 후보자는 기자들을 향해 “책임총리는 무슨, 그런 것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경솔하고 무책임한 답변’이라는 여론이 들끓자 ‘법에서 정한 용어가 아니었다는 의미’라고 해명했으나, 책임총리 논란은 이후 사라져 버렸다.
책임총리란 용어는 헌법이나 법률에 없지만 국민 모두가 알고 있는 정치적 표현이다. 헌법에 국무총리의 권한과 책임 규정이 있으나, 오랫동안 의미 없는 내용으로 치부돼 왔다. ‘잘못된 적폐’며 ‘정상화 해야 할 비정상’의 전형 가운데 하나였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대통령에게 쏠린 권한과 책임을 국무총리에게 분담토록 하기 위해선 ‘헌법대로 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고, 여야 모두 책임총리 실현을 공약으로 걸었다.
안 후보자 지명ㆍ사퇴와 문 후보자 지명ㆍ사퇴 사이에서 김기춘 대통령비서실장의 퇴진 여론이 들끓었다. 책임총리를 자임했던 안 후보자는 청와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진 사퇴했고, 책임총리라는 말을 처음 들어본다는 문 후보자는 청와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자진 사퇴를 미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안 후보자가 지명되었을 당시 언론과 정치권의 관심은 책임총리와 실세 비서실장이 양립할 수 있을 것인가에 쏠려 있었다. 문 후보자의 경우엔 ‘책임과 실세의 양립’ 문제는 논란조차 되지 않았다.
이후 새로운 총리 물색을 싸고 온 나라가 홍역을 앓고 있을 때 ‘사의를 표한 정홍원 총리를 재임명하는 것이 바람직한 결단일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박 대통령이 정 총리의 유임을 발표했을 때 ‘후속조치’가 있을 것으로 보았다. 정 총리를 새롭게 책임총리로 박 대통령이 만들어 줄 것이라는 기대였다. 책임총리가 되느냐 마느냐는 누구를 총리 자리에 앉히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대통령이 책임총리제도를 이행할 의지가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이며, 공약을 지키겠다는 결단이 필요한 일이다.
박 대통령이 “이제부터 헌법에 있는 대로 책임총리를 하라”고 말한다고 정 총리가 책임총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최소한 두 가지 실질적인 조치와 환경이 뒤따라야 한다. 우선 박 대통령이 왜 그를 재임명했으며, 앞으로 어떠한 권한과 책임을 부여할 것인지 국민 앞에 밝히고 약속해야 한다. 청문회를 피해가려니 할 수 없이 그렇게 됐다는 식으로 얘기하는 것은 국민에 대한 도리가 아니다. 총리를 계속 ‘없는 사람’으로 취급하겠다는 뜻이어서 ‘사의 총리’로 그대로 두는 것보다도 못한 상황이 된다. 다음으로 모든 부처 장ㆍ차관 공직자들의 시선이 총리를 비켜가서 청와대로만 쏠려있는 비정상을 되돌려야 한다. 장ㆍ차관은 물론 부처의 실ㆍ국ㆍ과장까지 청와대의 눈치만 보고 있다면 책임총리가 앉을 여지는 없다. 청와대 안에 ‘실세 비서실장’이 있어서도 안되며, 대통령 주변에 ‘총리보다 센 권력그룹’이 진을 치고 있어서도 안 된다. 박 대통령의 결단이 필요하다.
주필 bjj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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