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쉽게 내려오지 마라
도시생활의 염증일 수도 있고, 전원에 대한 향수일 수도 있다. 생계를 위해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일 지도 모르겠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 누구나 한번 쯤은 귀농을 생각해봤을 것이고, 실제 시골행을 택하는 사람들은 점점 더 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농촌과 농사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그 곳 역시 희망과 좌절, 기쁨과 설움이 되풀이되는 또 다른 전쟁터란 사실을 제대로 알고 있을까. 3년 전 본지 기자를 그만두고 농부로 변신한 원유헌씨가 새 연재물 '구례이야기'를 통해 땀과 눈물로 얼룩진 귀농의 빛과 그림자를 격주로 전해준다.
3년前 사직서 내고 서울 떠나 아내와 땅 보러 전국 돌아다니다 지리산 구례마을에 정착 결심 이삿날 아들은 소리 죽여 울어
“모내기 끝내면 논 농사 반은 끝낸겨…”
어른들 말씀에 조금 쉴 수 있으려니 했는데 또 속았다. 3년째 착각이다. 하지 무렵 비 오기 전에 감자 캐야 하고, 메주콩도 심어야 하고, 그 사이 풀들은 아들 놈 키만큼 훌쩍 자란다. 풀숲에 숨어 있는 울금을 구출하고, 옥수수만큼 커 버린 명아주도 뽑아야 한다. 에일리언처럼 생긴 쇠비름은 쥐눈이콩 밭을 덮어가고 있다. '조금만 기다려라 이 잡초들아. 내가 콩만 다 심으면 너희들을 발본색원 해주마.'
앞치마에 씨앗 콩 담고 밭으로 나섰다. 윗밭 장씨 아저씨한테 경운기를 빌려 곱게 갈아 놓았던 밭이 깔끔한 모습으로 기다린다. '요까짓 거 반 나절이면…' 호기 넘치게 시작했지만 몸 둔하고 손 느린 내게 만만한 일이 어디 있겠나. 무심한 태양만 뜨거운 마음으로 친구해줄 뿐 진도가 영 나아가질 않는다. 머리에 뒤집어 쓴 수건은 이미 흡수력을 잃었고, 허리를 숙일 때 마다 눈에서 땀방울이 떨어진다.
잠시 쉬는 동안 계산하는 버릇이 또 발동된다. ‘두둑이 15m씩 마흔 네 줄이니 대략 600m, 40㎝ 간격으로 콩을 심으니 1,500번을 허리를 숙여야 한다 이거지.’ 계산해보니 더 힘들다. 호미를 확 던져버리고 싶다. 물 마시러 가기도 귀찮다. 그냥 밭에 주저 앉았다.
‘대체 내가 왜 이 힘든 일을 해야 하는 거지?’ 나한테 따지고 또 따지다가 서울을 떠나던 때를 떠올렸다. 딱 3년 전이다.
‘사직서’라는 글씨를, 그것도 한자로 최대한 정성스럽게 써서 내니 기분도 최고였다. '잘 있거라 나는 간다'고 외치고 싶었지만 소심하게 입 모양 만으로 오물거리고 회사를 떠났다. 몇 년간 아내와 전국의 시군 절반은 돌아다닌 끝에 이 곳에 근사하진 않지만 살아갈 땅을 얻었다. 노고단이 보이는 곳에서 드디어 내 맘대로 살 수 있게 된 거다.
막상 이사 하던 날은 느낌이 묘했다. 서울 말고는 살아 본 적도 없는데, 부모 친지도 없는 천 리 떨어진 곳으로 떠나려니 착잡함이 찾아왔다. 짐을 싣다 보니 트럭이 넘쳐 침대도 버리고 이불장도 놔두고 떠나야 했다. 날씨는 묵직했고 가족이 탄 차 안 공기는 더 무거웠다. 이웃이 싸준 김밥이 말랐는지 아내가 입에 넣어줄 때마다 목이 멨다. 가기 싫다는 말을 못내 참아왔던 아들은 비 때리는 창에 기대서 소리 죽여 울고 있었다. 흡사 쫄딱 망해서 야반도주하는 가족들처럼 말 수 줄이고 애써 미소 지으며 달렸다. 지리산이 좋다고 걸핏하면 내려가던 길이었지만 색깔도 무게도 달랐다.
어스름 끼고 도착한 동네에는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마을 입구 회관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고, 비 맞은 고양이들만 두어 마리 돌아다녔다. 서운했다. '환영 플래카드나 박수까지야 언감생심이지만 아예 관심도 없는 건가.'
울컥하며 마당에 들어서니 동네 어르신들 20여 분이 비를 맞으며 서 계셨다. 2시간 전부터 그러고 기다리셨단다. 늦게 도착하는데 짐이라도 옮겨 주시겠다며 말이다. 포장이사 직원들의 날렵한 움직임에 한 발 물러선 이후로도 계속 마당을 떠나지 않으셨다. “톱 없나요?”라고 여쭤보면 어느새 벌써 톱질을 하고 계셨고 저녁 때가 되니 뱃속보다 빠르게 김치찌개가 배달됐다. 정신 없어서 그렇지 배 고플 거라고. 느낌에도 양이 있다면 단 하루에 일 년 치 감정을 다 겪은 듯 했다.
동네 어르신들은 우리 가족에 대해 궁금해 했다. “아는 사람도 없담서 머땀시 구례로 내려왔으까. 아직 젊은디 머 묵고 살랑가. 돈이 많아서 놀고 쉬고 헐라고 내려왔능가. 귀촌이 아니고 귀농을 한 거라고? 농사도 안 지어 봤담서 워찌 농사를 짓겠다고 설치는가”
농사 예상보다 너무 어려워 잡초가 벼 삼키고, 벌레가 파먹고... 동네 분들에 친환경 운운하니 "농사 박사라도 그렇게는 힘들제"
사실 이 분들의 문제 제기는 정확했다. 땅값은 오르고, 당시 마흔 다섯이면 아직 대처에서 왕성하게 돈 벌어야 할 나이다. 경치는 좋다지만 시골은 여전히 돈을 벌기엔 만만찮은 곳이고 그렇다고 내가 모아 둔 돈이 많은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농사를 지어서 먹고 살겠다니. 당신 자식들도 내려온다면 결사반대 막는 판에.
농사는 어르신들 걱정보다 훨씬 더 어려웠다. 논에선 잡초가 벼를 삼키고 작물 이파리들은 벌레 지나간 자리마다 구멍 난 스타킹처럼 흉하게 변했다. 동네 분들은 친환경 운운하는 초짜에게 “농사 박사라도 그렇게는 힘들재. 풀은 못 이기는 벱이여”라며 항복을 권유했다. 그럴 때마다 회의가 밀려오기도 했다.
그러다 귀촌한 사람들이 부러울 때도 있다. 텃밭이나 가꾸며 전원생활을 즐기는 귀촌은 농사를 업으로 선택한 귀농과는 차원이 다르다. 읍내 대형 마트에서 구입해가는 물건도 차이가 있고 싣고 가는 차도 달랐다.
귀농 꿈꾸던 후배는... "뭐가 제일 필요해요?"질문에 "절실함...난 그걸로 버틴다"대답 한달 후 전화로 "형, 저 이민가요"
여기서 알게 된 친구 하나가 귀농한 사람과 귀촌한 사람을 구분하는 자기만의 방법을 알려줬다. 머리를 길러 뒤로 묶었거나 일부러 수염을 길렀거나 또는 개량한복을 입은 사람들은 대부분 귀촌한 사람들이란다. 그만큼 귀촌한 사람들은 여유가 있어 보여 여기 표현으로 ‘깨꼬롬’하다는 얘기다. 하지만 부러워도 어쩌겠는가. 나는 그만큼 사정이 안 되는걸.
대기업이나 공공기관이 대규모 명예퇴직을 시행한다는 뉴스만 나와도 가슴이 철렁한다. ‘잘나가는 곳이니 명퇴금도 많을 것이고, 그 중에 적잖은 사람이 귀농이나 귀촌을 생각할거고, 구례도 선호 지역이니 내려와서 땅값만 훅 올려버리면 어쩌나. 논을 조금 더 사야 하는데 또 오르겠네’
이것 저것 생각하니 머리만 쑤신다. 2년 전 귀농해 지방자치단체 지원받아서 대규모 시설 원예를 시작했던 후배가 실패를 이기지 못하고 다시 올라갔다. 농업정책도 대농 중심이니 나 같은 소농에겐 햇살이 돌아오지 않는다. 농축산 시장은 열어 젖히지 못해 안달이다. “농촌으로 내려가라”고 소리치지만 논이 3,000평 안 된다고 직불금도 안 나온다. 논 열 닷 마지기가 뉘집 애 이름인가.
“눈이 게으르고 손이 보배여~” 지나가던 장씨 아저씨가 넋 잃고 앉아 있는 내게 소리치신다. 충고와 격려가 함께 담긴 말씀이다. 다시 가벼워진 호미를 들었다.
몇 달 전 후배가 찾아와 무겁게 호미질 하던 내게 회사 생활이 힘들다며 물었다. “형은 행복하세요?”
'참나, 이 녀석 내가 행복하지 않으면 어쩌려고 그런 질문을 함부로 하는겨. 그런 건 드라마에서 전 여친의 새 남친한테나 묻는 거 아녀?' 속으론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래도 대답해 줬다. “불행하진 않네. 힘들어도 괴롭진 않으니까”
“마을 분들은 잘 해주세요?”
“말해 뭐 해. 그 덕에 사는데”
“이쪽에 땅 괜찮은 거 나오면 좀 소개해 주실래요?”
“그럼 그래야지”
“내려올 때 뭐가 제일 필요하던가요?”
이 대목에서 난 좀 뜸을 들였다. 그리곤 무겁게 답했다.
“절실함. 그거 없으면 내려올 생각 말아라. 힘들어도 그걸로 버틴다.”
한 달 뒤 후배한테 전화가 걸려왔다. “형, 저 이민 가려구요”
前 한국일보 기자 cameragag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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