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 이후 확대된 복지제도를 보면서 어떤 이는 마치 복지국가가 된 것처럼, 어떤 이는 지나친 ‘복지과잉’ 시대가 온 것처럼 호들갑을 떤다. 선거 때만 되면 각종 복지공약이 나온다. 그러면 한국이 복지국가인가? 혹은 ‘복지과잉’ 시대가 왔는가?
복지국가 여부를 가늠하는 중요한 지표로서 국내총생산(GDP) 대비 사회복지지출 비중이 있다. 그런데 ‘사회복지지출’이 간단한 개념은 아니다. 정부복지예산과 사회보험급여로 구성된 ‘공공사회복지지출’이 있다. 여기에 퇴직금 등 법정민간지출을 더한 ‘사회복지지출’이 있다. ‘사회복지지출 + 민간을 통한 급여 = ‘총사회복지지출’이다. ‘공공사회복지지출’ ‘사회복지지출’ ‘총사회복지지출’ 중 언론을 통해 가장 많이 접하는 개념이 국내총생산 대비 ‘공공사회복지지출’ 비중이다. 복지국가로 부를 수 있는 국가에서 이 비중은 대개 20~30%가 된다. 여기에 민간의 법정ㆍ자발적 지출을 더하면 35% 전후 수준이 된다.
우리나라의 경우 국내총생산 대비 공공사회복지지출 비중은 10%가 채 안되고 민간지출까지 합쳐도 12% 수준 정도이다. 다른 복지국가에 있는 사회보험, 공공부조, 사회서비스, 주거ㆍ고용지원, 교육복지 등의 제도는 있지만 보장범위가 아직 폭넓지 않고 급여수준도 낮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단 우리나라는 복지국가도 아니고 ‘복지과잉’ 상태도 아니다. 워낙 없던 것을 본 사람들 시각에서는 그나마 생겨난 복지제도가 많아 보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이제 본격적으로 복지제도를 도입한 지 10여 년도 안됐으니 앞으로 시간이 흐르면 경제성장의 성과에 따라 복지제도에 발전이 있다고 낙관할 수 있을까? 아니다. 경쟁과 효율, 성장을 강조하는 개발독재시대를 지내오면서 한국사회는 연대를 잊고 승자독식이 당연한 사회가 되었다. “파이가 커지면 나눈다”는 거짓말에 속은 대중은 이제 국가와 사회에 대한 신뢰를 잃어가고 있다. 1인당 국민소득 1만달러 수준일 때 사회복지지출 비중이 20%를 넘어간 복지국가들의 예를 우리 현실에서는 찾기 어렵다. 비슷한 상황에서 우리는 3% 수준을 보였다. 그리고 1인당 국민소득 2만달러를 훌쩍 넘겼지만 그 비중은 10% 전후를 보이고 있을 뿐이다.
선진국의 경험은 경제성장과 동시에 발전하는 복지제도를 만들어야 함을 보여주었다. 어려운 처지에서 콩 한조각이라도 나눠 먹을 줄 아는 사람이 형편이 넉넉해질 때에도 나눌 줄 아는 법이다. 나누는 법을 못 배웠거나 나눔 자체를 싫어하는 사람은 손안에 아무리 많은 것을 쥐고 있어도 나누지 않는다.
그렇다면 선진복지국가에서는 성장과 나눔의 동반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확립한 민주주의 때문이다. 이를 에스핑-안데르센은 ‘완전한 민주주의(full democracy)’라고 불렀다. 소수정당의 표도, 독일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정당 득표율 5% 이상이 되면 의석 수에 반영된다. 권력분배의 기회가 다양한 사회 집단에게 보장되는 의미에서 ‘완전한 민주주의’이다. 산업화 이후 그 어떤 시기에도 경제성장 자체, 국내총생산 확대 그 자체가 사회복지지출 증가와 연결되지 않았음을 에스핑-안데르센은 그의 유명한 저서 ‘복지자본주의의 세가지 체제’에서 논증하고 있다. 오히려 좌파정당 등 다양한 사회집단의 요구를 정책에 반영할 수 있는 민주정치체제 정착이 복지국가 발전으로 이어졌음을 보여준다.
일제로부터의 해방 이후 한국 정치 현실에 크게는 노동운동의 목소리, 작게는 다양한 사회적ㆍ문화적ㆍ인종적ㆍ성적소수 집단의 목소리가 반영될 수 있는 구조는 생겨나지 않았다. 1987년 이후 확립되기 시작한 선거민주주의의 결과를 ‘여야 보수’집단이 독식하는 구조만 존재한다. 이른바 좌파 정권 이야기를 하지만, 복지국가 발달의 동력이 된 ‘시장경제주의(=보수) 대 사회민주주의(=진보)’ 간 협조와 경쟁, 여기에 녹색당 등 제3 정당이 어우러지는 정치 구도를 우리는 한번도 체험하지 못했다. ‘완전한 민주주의’를 통한 지속가능 성장을 이루어가는 복지국가 역사를 제대로 배워야 할 때이다.
정재훈서울여자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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