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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누군가에게 선뜻

입력
2014.07.03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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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정선과 태백으로 해서 경북 봉화엘 다녀왔다. 국내여행의 달인이기도 후배가 농산물 구매 사이트를 열어 농부들을 돕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 농부들도 만날 겸 여행을 떠난다는 후배를 따라나섰다. 평소 오지를 많이 다니는 후배를 통해 야생화 이야기를 듣는 걸 좋아했던 나는 그 길에서 꽃도 사람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여름 여행은 단연 물의 여행이었다. 산골짜기 골짜기마다 흐르는 물도 물이려니와 한여름의 나무들이며 거대한 바위들까지 물을 한껏 머금은 듯 기개가 높았다.

평소 깊은 산에서 자주 보았지만 이름을 알 수 없었던 야생화 앞에서는 가슴이 뛰었다. ‘범의 꼬리’ ‘꿩의 다리’ 같은 이름들이 일개 식물 이름이 아니라 시의 제목 같다는 생각이 들어 더 그랬다. 세상에나, 그 꽃들의 이름은 도대체 누가 지었는가 말이다.

후배는 여행자들을 인솔해 숨겨진 여행지를 안내하는 일을 하기도 하는데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 사람들이 하도 꽃 이름을 물어 일일이 대답하지 못해 난처한 적이 있었단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야생화 도감을 구입해 그때 봤던 꽃들의 이름을 달달 외웠단다. 사람들이 물으면 이번엔 척척 대답해 주리라 마음먹고는 말이다. 다음 여행을 인솔했지만 다시 갔을 때는 그새 그 꽃들은 다 지고 다른 꽃들이 피어 다시 한번 난처한 일을 겪고 말았더란다. 대개 꽃이야 열흘을 붉는 법이니 다시 찾은 사람들을 기다려줄 리가 만무하지 않은가. 그 말을 들은 나는 덩달아 신이 나 이 꽃 저 꽃 이름을 물었다. 그날 배운 꽃 이름들을 다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나는 산길에서 후배의 음성으로 낭송해 준 여러 시들을 귀담아 들은 기분으로 부자가 됐다.

정선에 도착했다. 여러 밭농사를 지으며 산에서 나는 칡이며 약초들을 캐기도 하는 연배의 한 농사꾼을 만났다. 칡은 겨울에 언 땅을 파서 캐내야 좋다는 사실도 배우고 도시 사람들에게 은근 인기를 끌고 있는 야생에서 자라는 민들레를 직접 캐 만들어봤다는 민들레즙도 칡즙과 함께 맛보았다. 사람을 보고 이야기를 들어서 그런지 칡즙과 민들레즙에선 사람 맛이 났다. 그때 농부가 내놓은 것이 있었는데 하수오로 담갔다는 술이 담긴 커다란 술병이었다. 나는 그것을 함께 마시자는 의미로 알았는데 약술이니 가져가서 맛을 보라는 거였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서 만난 지 몇 분 되지 않은 사람에게서 받은 선물이라니, 기분 참 묵진했다.

그날 밤 후배와 나는 삼척으로 내려와 하수오 술병을 열었다. 몇 잔을 넘겼지만 쓴 맛과 진한 맛이 낯설어 술병을 옆으로 밀어뒀다. 옆에 있던 술집 사람들에게도 많이 나눠줬다. 그러고는 ‘약술이라서 그런가. 많이 쓰네’ ‘머리가 아픈 것 같네’ 했던 것이다.

다음 날이 됐다. 태백에는 일 년에 한 번씩 가는 편이지만 한 번도 오일장엔 가본 적이 없어 후배와 함께 오일장을 둘러보던 중이었다. 잠시 사라진 것 같던 후배가 뛰어오더니 한 마디 했다. “형, 어제 그 하수오 술이요. 저기 장에서 팔길래 물어봤어요. 이런 건 얼마 받으시냐구요. 그랬더니, 그게.”놀라 자빠질 노릇이다. 80만원이란다. 술병의 크기도 같고 색깔도 비슷하고 한 그것의 가격이 무려 그렇다는 것이었다.

선물이 엄청나다는 사실을 알고 이미 미안한 마음이야 있었으나 지난 저녁 가볍게 여기기만 했지 제대로 대우를 못했다는 사실이 당최 겸연쩍었다. 사실 그것이 얼마나 진귀한 약재인 줄은 모르고 그저 숫자만으로 뒤로 목이 넘어가는 것이 인간의 얇은 구석임을 모르지는 않지만 그러고서도 나는 벌어진 입을 오래 다물지 못했다. 담에 오시면 한 병 더 준비해서 드릴게요, 했던 농부의 음성이 얄궂게도 다시금 들리는 듯했다.

여행을 마치고 올라오는 길에 물이 잔뜩 오른 산과 물과 땅과 나무를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여기도 저기도 넘쳐나는 짙은 풍요의 풍경을 가만히 마음에 담으면서 나는 생각했다. 우리는 참 부자구나. 차 뒷좌석에는 반도 더 남은 하수오 술이 찰랑찰랑 실려 있고, 처음 본 누군가에게 그리 선뜻 내줄 마음이란 것도 있고, 이렇게 스치듯 만난 기억의 힘으로 열흘이나 꽃을 피울 수도 있으니 우리는 이토록 부자이고 또 부자구나, 라고.

이병률 시인·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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