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왜] 박일근 베이징 특파원 현장 르포 신장테러 5주년 앞두고 긴장 고조된 우루무치
지난 1일 중국 신장(新疆)위구르자치구 우루무치(烏魯木齊)시 기차역 앞 광장. 위구르어와 한자로 쓴 역 현판 아래로 기차를 타고 내리는 사람들아 뒤엉켜 있다.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기차역 풍경이다. 하지만 거기서 시선을 돌리자마자 광장 입구에 버티고 선 장갑차와 군복 차림 무장경찰 30여명이 눈에 들어온다.
30도가 넘는 날씨에도 무장경찰들은 철모까지 쓰고 중무장을 했다. 장갑차를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각각 서너 명이 조를 짜서 망을 보고 있다. 옆에는 시위진압용 경찰차가 줄지어 서 있다.
우루무치역은 지난 4월 30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신장위구르자치구 시찰 때 발생한 자살폭탄 테러로 3명이 숨지고 79명이 다친 곳이다. 시민들은 4ㆍ30 사건 후 새로 설치된 철제 울타리로 사실상 봉쇄된 것이나 다름없는 광장에 들어선 뒤에도 세 차례 검문 검색을 통과해야 역 안으로 진입할 수 있다. 장갑차는 위구르족 밀집 지역인 얼다오차오(二道橋) 등 우루무치 시내 곳곳에서도 쉽게 볼 수 있었다. 특히 얼다오차오 시장에서는 무장경찰들이 초소를 굵은 철망으로 두른 뒤 그 안에서 보초를 서고 있었다.
오는 5일은 우루무치에서 한족과 위구르족이 충돌해 약 200명이 숨지는 유혈 사태가 발생한지 5년이다. 2009년 6월 중국 남동부 광둥(廣東)성에서 한족 여성이 성폭행 당했다는 소문에 격분한 한족들이 가해자로 지목 된 위구르족 노동자를 공격해 2명이 숨지는 사건이 터졌다. 이 소식이 중국 북서부 끝 우루무치까지 전해지자 위구르인들은 그 해 7월 5일 진상 조사 등을 요구하며 거리로 나섰다. 이 과정에서 경찰과 충돌이 벌어져 한족 희생자가 발생했다.
한족들이 다음 날 위구르인에게 보복하면서 사태가 커졌다. 당시 중국 정부가 발표한 공식 사망자 수는 한족 134명을 포함해 총 197명. 그러나 해외 망명 위구르족 단체인 세계위구르회의(WUC)는 실제 사망자가 3,000명에 이르고 위구르족 피해자가 더 많다고 주장한다. 누구의 말이 진실인지는 지금도 분명하지 않지만 정부 발표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숨졌다는 데는 현지 주민들도 고개를 끄덕인다.
당시의 상흔이 아직도 가시지 않은 듯 이날 얼다오차오 시장에선 한족을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무장경찰들은 위구르인을 골라 수시로 신분증 제시를 요구했다. 이런 차별은 외부에서 우루무치로 연결되는 도로에서 실시되는 차량 검문 검색에서 더 심했다. 위구르인들은 차에서 모두 내려 검색대를 따로 통과해야 했다. 고속버스에 실었던 짐도 다시 꺼내 검사를 받았다. 위구르족 여성들은 머리와 얼굴을 가리는 히잡까지 벗고 수색을 받는 수모도 감수해야 했다. 한족들은 얼굴만 확인되면 무사 통과였다.
삼엄한 검문검색에도 시민들 모습 평온
지난 5월 22일 차량 폭발물 테러로 43명이 숨진 런민(人民)공원 부근의 거리 시장인 궁위안베이제(公園北街)에는 차도와 인도를 구분하는 철제 울타리가 새로 설치돼 있었다. 교차로 초소는 차량 충돌 공격을 막기 위한 각종 장애물을 세워 방호를 해 놨다. 감시카메라 공사도 진행되고 있었다.
우루무치의 주요 기관, 특히 학교 정문은 어김없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경찰들이 지키고 서 있었다. 전용급행버스인 BRT를 탈 때와 호텔이나 백화점에 들어설 때도 짐은 검색대를 통과해야 하고 몸수색이 필수다. 시내 각 공원도 빙 둘러 철조망을 쳐버려 입구에서 검문을 받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다.
삼엄한 풍경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의 모습은 겉으론 평온했다. 이 같은 모습은 장갑차와 위구르인들에 대한 차별적인 검문ㆍ검색만 제외하면 지난달 톈안먼(天安門) 민주화 운동 25주년 직전 베이징(北京) 풍경과도 다르지 않다. 시민들은 이미 익숙해져 큰 불만도 없는 듯 보였다. 40대 중반의 한족 시민 왕(王)모씨는 “외국 언론들이 과장 보도를 해 우루무치가 불안한 것처럼 잘못 알려져 있지만 생활하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다”며 “안심해도 좋다”고 말했다.
우루무치 시민들이 걱정하는 것은 오히려 경제에 영향을 미치고 돈벌이가 줄어드는 것이었다. 한 택시 기사는 “지난해에 비해 수입이 절반으로 줄었다”며 한숨을 쉬었다. 외부 관광객이 30% 이상 감소한 데다 외출도 줄어든 탓이다. 여행 광고지를 나눠주던 한 여성은 “관광지 안전은 최우선으로 확보되고 있다”며 “가격도 떨어져 여행자에게는 좋은 기회”라고 말했다.
그러나 속으로는 다들 불안을 껴안고 있는 듯 했다. 50대 주부 쑨(孫)모씨는 귓속말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갈 땐 주의해야 한다”며 “특히 밤에 위구르족 밀집 지역에 가는 것은 삼가라”고 귀띔했다. 실제로 50여명 이상 집회를 금지한다는 통지도 내려진 것으로 알려졌다. 당국의 테러와의 전쟁으로 최근 한 달 사이 구속된 사람만 약 380명에 이른다. 특히 지난 달 말부터 시작된 이슬람 단식성월 라마단을 맞아 공무원과 학생, 교사들에게는 라마단 참여가 금지된 것으로 전해졌다.
“테러는 가난한 남부 위구르인의 극단 선택”
한족과 위구르족의 충돌은 왜 끊이지 않는 것일까. 주민들은 그 배경과 원인에 대해 다양한 분석을 내 놨다. 고향은 동부 해안의 장쑤(江蘇)성이었으나 할아버지가 “마오쩌둥(毛澤東)에게 속아” 신장으로 온 뒤 이 곳에서 살고 있다는 한족 장(江ㆍ32)모씨는 “가난하고 일자리도 없어 희망을 포기한 난장(南疆ㆍ신장 남부)의 일부 위구르인들이 극단적인 방법을 쓰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일자리도 있고 가정도 있는 대다수의 위구르인들은 결코 테러를 일으키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한족 여성 자오(趙ㆍ41)씨는 “돈이 없는 난장 위구르족에게 테러에 가담하면 큰 돈을 주고 만약 숨지면 부모에게 그 돈을 지급해 편안히 살 수 있게 해주겠다고 꼬드기는 세력들이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신장위구르자치구 정부는 지난 4, 5월 잇따라 테러가 일어나자 남부 출신 위구르인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명령까지 했다.
한족 대학생 리(李ㆍ23)모씨는 “성전(聖戰ㆍ지하드)에 참여했다 숨지면 천국으로 간다고 믿는 일부 이슬람교 위구르인들이 테러를 벌이고 있다”며 “민족간 문제가 아니라 종교의 문제”라고 설명했다. 위구르족 상인 아이린(35)씨도 “최근 테러를 일으킨 일부 위구르인들이 전체 위구르족을 대표한다고 보면 안 된다”며 “대다수의 위구르족은 테러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데 오해를 받으며 큰 피해를 보고 있다”고 말했다. 60대의 한 한족 남성은 “테러분자들을 모두 처단하는 것 외엔 방법이 없다”고 격앙했다.
중국 당국은 우루무치를 중심으로 한 테러를 이 지역 분리ㆍ독립을 목표로 하는 동투르키스탄 이슬람운동(ETIM)의 조직적인 행위로 보고 있다. 중국 국가인터넷정보판공실에서는 지난달 24일 ETIM이 온라인을 통해 테러 행위를 선동하고 있다는 동영상을 공개했다. 지난해 6월 경찰서 습격 사건의 주범으로 지목된 남자가 “(성전을 호소하는)동영상을 수도 없이 봤고 휴대폰에도 내려 받았다”며 “그러는 사이 성전을 갈망하게 됐다”고 말하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중국 당국의 주장과 달리 전문가들은 ETIM이 중국 내에서 테러를 조직할 능력이 없다고 본다. 잇따른 테러에도 불구하고 범행을 자처하는 성명이 없는 점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직업 테러리스트에 의한 범행이라기 보다 중국 당국에 불만을 가진 위구르족이 인터넷을 통해 얻은 정보로 폭탄을 제조해 각각 범행에 나서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 포용보다 진압 앞세워 해결 난망
신장위구르 지역이 중국의 영토로 편입된 것은 지극히 최근의 일이다. 유라시아 대륙의 정중앙인 이곳은 유럽과 아시아의 교차로로 수 천년 간 숱한 민족과 나라가 주도권을 다투면서 명멸한 곳이다. 미국의 탐험가 오언 래티모어가 ‘아시아의 축’이라고 불렀고 우리가 서역(西域)이라고 알고 있는 땅이 바로 이 곳이다. ‘신장’이란 말도 만주족이 세운 청 건륭제가 1750년 이 곳을 정복한 뒤 ‘새로 얻은 강역’이란 뜻에서 붙인 것이다. 한족들은 이 곳을 원래부터 중국 땅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얘기가 된다.
실제로 흉노, 한, 유연, 돌궐, 당, 티베트, 위구르왕국, 탕구트, 거란, 여진, 카라한조, 가즈나조, 셀주크조, 몽골, 카라 키타이, 청, 코칸드, 아미르국, 1ㆍ2차 동투르키스탄공화국이 역사상 이 곳의 지배자로 등장했다 사라졌다. 결국 1949년 중국공산당이 신장을 장악해 지금에 이르고 있지만 얼굴 생김새와 종교는 물론 말과 글까지 전혀 달라 민족간 융합이 쉽지 않다. 지금도 이곳엔 위구르족과 한족 외에 하사커족, 카자흐족, 키르기스족, 타지크족, 우즈베크족, 회족, 몽고족, 만주족 등이 살고 있다. 자치구의 2,200만여명(2012년 기준) 인구 중 60%가 소수민족이다.
이런 역사성까지 감안하면 신장의 불안이 쉽게 가라앉기란 힘들다. 신장이 ‘중국의 화약고’로 불리는 이유다. 20세 안팎의 한 위구르 학생은 “이곳엔 70년 전만 해도 위구르족이 세운 나라(동투르키스탄공화국)가 있었고 독자적인 화폐까지 발행됐다”며 “위구르족이 위구르족의 나라를 세우고 싶어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6월 24일 위구르 인에게 한족 여성이 성폭행을 당했다는 소문에 격노한 한족 노동자들이 성폭행이 발생했다고 알려진 광저우 샤오관 장난감공장의 위구르 노동자들을 공격 최소 2명이 숨지고 118명의 부상자가 발생한 것에서 시작한다. 이에 자치정부에 정확한 진상조사를 요구하는 위구르인들의 평화적 거리행진은 이를 저지하려는 정부군과의 충돌로 번졌고, 점차 억압과 차별의 울분을 표출하는 시위로 그 의미가 확대됐다. 몽골족 여대생 저우(周ㆍ23)모씨는 “우루무치의 가게 주인들은 모두 한족인데 종업원은 대부분이 위구르족”이라며 “이곳에서 나는 석유와 가스도 대부분이 동부의 한족들 도시로 보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레비야 카디르 세계위구르회의 의장도 최근 외신과 인터뷰에서 “신장의 충돌은 당국의 탄압에 평화적으로 항의할 방법이 없는 위구르족의 저항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중국 정부는 민족 간 증오를 조장하는 선동적인 언행을 중단하고 위구르족에 대한 집단 차별과 처벌을 중지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는 중국 지도부가 소수민족을 희생양 삼아 통치 구심력을 강화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한족 뤄(羅ㆍ29)모씨는 “위구르족이 독립을 원하는 것을 알고 있다”며 “그러나 이를 허용하면 티베트와 내몽골도 독립을 요구할 것이 분명해 한족으로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신장위구르자치구의 면적은 166만4,900㎢로 중국 전체의 6분의 1을 차지한다. 대부분이 타클라마칸 사막과 황무지던 이곳에서 최근에는 석유와 가스, 석탄 등이 계속 발굴되고 있다. 이 때문에 갈수록 한족의 수가 늘고 있다. 오랫동안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며 문화의 용광로 역할을 한 신장은 더 급속도로 한화(漢化)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이다. 게다가 중국 당국은 소수민족 포용 보다 테러에 대한 강경 대응을 앞세우고 있다. 우루무치에서 유혈사태가 그치길 다들 바라지만 지금은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우루무치=박일근특파원 ik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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