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에 ‘남영동에 끌려 간다’는 말은 고문을 당한다는 뜻이었다. 2011년 작고한 김근태 의원은 1985년 9월 4일 남영동에 끌려 갔다. 22일만에 풀려나기까지, 그는 남영동 건물 5층 맨 끝 방에서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고문을 10차례 당했다. 물고문에서 시작해 전기 고문, 전기봉 고문, 그리고 고문자들이 가하는 심리적 고문까지도 견디며 짐승 같은 시간을 보냈다. 고문자들은 그의 굴복을 기대했지만 김 의원은 마지막 자존심의 불씨를 지키며 이 끔찍한 시간을 이겨 냈고 1985년 12월 19일 법정에 서서 남영동에서 일어났던 일을 만천하에 고발했다.
‘짐승의 시간’은 김근태가 남영동에서 겪은 짐승 같은 시간을 만화로 기록한 책이다. 만화가 박건웅이 564쪽에 달하는 두터운 분량으로 당시의 사건을 세밀하게 재현했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민간인 학살을 다룬 ‘노근리 이야기’, 제주 4ㆍ3항쟁을 그린 ‘홍이 이야기’ 등 역사의식이 강한 작품을 선보여온 박건웅 작가는 이번 작품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제도나 틀 안에 갇혀 행동할 때 어디까지 악해질 수 있는지에 주목한다. 고문을 직업으로 여기는 이들의 폭력적인 몸짓과, 고문을 가할 때 희열에 찬 표정까지 놓치지 않고 표현해 냈다.
김 의원에게 씌워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는 그가 세상을 떠나고 2년 반이 지난 2014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벗겨졌다. 김 의원이 2009년 전남대 시국강연에서 한 말은 그가 평생 동안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면서도 마지막까지 한국 민주화 실천에 헌신하고자 했음을 보여준다. “거대 국가 폭력 앞에 인간은 나약하다. 그렇다고 포기하면 지는 거다…부조리한 사회에 눈 감고 애써 현실을 외면해 버리는 우리의 무관심과 싸워야 한다.”
황수현기자 sooh@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