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험극 선봉장 '당신의 눈', 정형화된 연극 요소 모두 갈아엎어
국내 최초 말 뮤지컬 '이매진', 말이 주인공 다양한 동물 등장시켜
태권도 소재 대사 없는 연극 '탈', 격파·전통춤·브레이크 댄스까지
연극의 4대 구성요소는 배우, 무대, 관객, 희곡(극본)이다. 뮤지컬은 여기에 춤과 노래를 곁들여 극을 완성시킨다. 대부분의 극이 이 같은 구성요소를 관습적으로 받아들이고, 이 때문에 극장을 찾은 관객은 자신이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 이 틀에 길들여진다. 하지만 정형화한 틀을 깨려는 시도가 실험극이라는 이름으로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올 여름 실험극의 선봉에 선 공연은 연극 ‘당신의 눈’이다. 이 연극은 서사 중심으로 극을 전개하는 방식에서 탈피해 같은 상황을 서로 다른 등장인물의 시각으로 반복해 보여주는 독특한 형식을 띠고 있다. 2012년 초연 당시 서사 위주의 연극에 식상함을 느꼈던 관객들이 마니아 층을 형성해 벌써 세 번째 공연에 들어갔다.
‘당신의 눈’은 극 중 작가인 정아(서미영 분)의 죽음을 중심사건으로 설정해 그 전후 과정을 추리해나가는 ‘두뇌추리극’을 표방한다. 그의 죽음을 교통사고로 결론 낸 경찰의 시각과, 목격자인 시각장애인 민수(김조연)와 귀녀(이선주)의 시각으로 교통사고 장면을 반복해 연기한다. 그 과정에서 장애인을 바라보는 다양한 등장인물의 시각, 같은 경험을 서로 다르게 기억하는 주인공 정아와 민수의 시각 등 여러 개의 ‘눈’이 등장한다.
인물에 초점을 맞춘 서사가 아닌 작품 전체의 구조에 중점을 둔 만큼 이 연극은 정형화한 연극요소와 형식에 변주를 가한다. 인물 중심이 아닌 구조 중심의 희곡을 쓰고 ‘관객의 눈’을 작품에 이식하기 위해 무대 위에 객석을 마련했다. 또 무대 뒷모습과 분장실을 공개해 관객과 배우 사이의 벽을 완전히 무너뜨리며 객석을 이야기의 중심에 서게 한다. 연극의 주요 구성요소를 모두 새롭게 구성한 ‘당신의 눈’은 결론적으로 ‘대중이 가진 상식이 어쩌면 잘못된 시선일지 모른다’는 중심 메시지를 전달하기에 최적화한 연출문법을 선택한 셈이다.
‘당신의 눈’이 극의 구성요소를 모두 갈아 엎었다면, 부분적인 변형을 통해 새로운 시도를 감행한 작품도 있다. 국내 최초의 호스(horse) 뮤지컬 ‘이매진’은 사람이 아닌 동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배우의 사전적 정의를 확장시킨 작품이다. ‘이매진’은 스포츠인 승마와 예술로 분류되는 뮤지컬을 결합한 공연으로 말과 기수가 하나 돼 펼치는 퍼포먼스에 마임, 성악, 아크로바틱 등 다양한 문화적 콘텐츠를 더했다. 특히 말의 특징으로 거론되는 힘, 스피드, 점프 등을 뮤지컬 속 안무로 녹여낸 점이 이채롭다.
‘이매진’을 기획한 이병수 프로듀서는 “인간과 동물의 화합과 공존을 무대 위에서 표현하고 싶었다”며 “말 못하는 짐승도 무대 위 연기를 통해 다른 배우 또는 관객과 소통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고 밝혔다.
‘이매진’에는 말 외에 돼지, 개 등 다양한 동물이 등장한다. 그 중 굳이 말을 주인공으로 선정한 이유 역시 공존과 화합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다. 이 프로듀서는 “인간 주변의 동물 중 가장 우아하고 화려한 동물이 말”이라며 “극 중 다른 동물을 포용하는 말처럼, 현실 사회에서도 권력과 부를 쌓은 이들이 대중과 공존하길 바라는 소망을 담은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무대에 가상의 이미지를 입혀 변형을 꾀한 작품도 있다. 국기인 태권도를 소재로 무대를 꾸민 ‘탈’은 언뜻 보면 전형적인 넌버벌퍼포먼스(대사 없는 공연)다. 하지만 무술에 3차원 맵핑기술(미리 디자인된 영상을 프로젝터를 통해 영사시켜 새로운 증강현실을 만들어내는 기술)을 결합했다는 점에서 기존 넌버벌퍼포먼스와 차이가 있다.
이제껏 넌버벌퍼포먼스는 대부분 대사가 거세된 탓에 서사 전달이 어렵다는 약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탈’은 무대 배경에 펼쳐지는 영상을 통해 관객에게 극의 흐름을 효과적으로 설명한다. 덕분에 ‘탈’은 대사 없이도 연극을 보는 듯한 착각이 들게 한다. 여기에 다양한 격파와 무용수들의 전통춤, 비보이들의 브레이크 댄스까지 90분간 다양한 장르의 혼합이 이루어진다.
이처럼 실험극과 이색공연이 꾸준히 무대에 오르는 것을 두고 현장에는 두 가지 시선이 공존한다. 새로운 시도로 장르의 벽을 허물어 예술의 영역을 확장시킨다는 긍정적 시각이 있는 반면, 지나친 실험정신과 볼거리 위주의 공연은 경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이에 대해 연극 평론가 김명화씨는 “예술의 새로운 시도를 굳이 ‘좋고 나쁨’ 또는 ‘옳고 그름’의 잣대로 구분할 수는 없다”며 “탄탄한 구성과 메시지를 갖춘 작품은 대중에게 오래도록 사랑 받고 그렇지 않은 작품은 자연스럽게 명멸할 것”이라고 말했다. 연극 평론가 구히서씨 역시 “예술에는 정해진 기본이 없다”며 “장르의 구별보다 ‘어떻게 만드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분명한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다면 그 도구가 입이든, 몸짓이든, 손짓이든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박주희기자 jxp938@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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