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에서 원근법을 발명한 이는 르네상스 시대에 활동한 건축가 필리포 브루넬레스키다. 원근법이란 물체와 공간을 눈으로 보는 것과 같이 멀고 가까움을 느낄 수 있도록 평면 위에 표현하는 방법이다. 원근법이 예술에서만 의미 있는 게 아니다. 가까운 것과 먼 것, 중요한 것과 사소한 것, 본질적인 것과 현상적인 것을 균형 있게 바라보는 원근법적 상상력은 사회 현실에 대한 정확하고 객관적인 인식을 가능하게 한다.
가령 세월호 참사 이후 국가개조에 대해서도 원근법적 상상력이 요구된다. 국가개조란 뭔가? 나라를 고쳐 새롭게 만드는 것이다. 나라를 바꾸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하나? 원근법에 따라 가까이 놓인 것을 보면, 바뀌어야 할 대상을 분명히 하고 바꿀 수 있는 주체가 있어야 한다. 재난 대처 시스템, 관피아, 안전불감증이 대상이라면, 정부와 시민사회는 주체다.
문제는 국가개조 담론이 제시된 지 한 달이 넘었는데도 구체적인 프로그램이 여전히 모호하다는 점이다. 국가개조의 책임을 져야 할 총리의 인사 논란만 반복돼 진행됐을 뿐이다. 게다가 그 총리마저도 돌고돌아 세월호 참사에 책임을 지겠다며 사의를 표명한 정홍원 총리로 되돌아왔다. 과연 정부에게 국가개조 의지가 있는 것인지의 의구심을 갖게 한다.
원근법에 따라 멀리 놓인 것을 보면, 세월호 참사를 가져온 근본 원인은 ‘돌진적 근대화’의 그늘이다. ‘효율·결과·성장·국가’만을 중시한 돌진적 근대화는 ‘가치·과정·복지·국민’을 경시함으로써 정경유착, 부정부패, 사회양극화, 감시사회를 강화해 왔다. 그 결과 공동체로서의 한국사회는 지속불가능한 지점에 도달해 있고, 이런 낯선 사회를 살아가는 국민 다수에게 불안과 두려움을 안겨준다.
주목할 것은 이런 현실에 대한 책임에서 산업화세력과 민주화세력 모두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이다. 생명 없는 물질 추구, 정의 없는 기업 지배, 복지 없는 사회통합, 국민 없는 국가 운영은 산업화 시대에 기원한 것인 동시에 민주화 시대에 강화돼 온 것이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모범적으로 이뤄왔다는 과거에 대한 자부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새로운 미래를 꿈꾸기 어렵다는 현재에 대한 자각이다.
가까이 보나 멀리 보나 우리 사회가 중대한 전환점에 놓여 있는 것은 분명하다. 우려스러운 것은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끌어온 사회적 활력을 적잖이 상실했다는 점이다. ‘두 국민’으로 나눠진 정치, ‘갑을관계’로 양극화된 경제 속에서 세대를 가로지르는 불안의 의식과 욕망의 문화가 번성하는 게 우리 사회의 현주소다. ‘보수적 선진화’, ‘진보적 복지국가’라는 시대정신도 제대로 꽃피워보지 못한 채 권력 쟁취의 담론으로 소비해 온 게 우리 사회의 자화상이다.
어디서부터 국가개조를 시작해야 할까? 먼저 나는 ‘국가개조’라는 말부터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국가개조란 철 지난 어법이다. 전통사회에서 근대사회로의 변화에서는 국가개조가 필요하다. 하지만 산업화와 민주화를 넘어선 새로운 시대정신을 추구해야 할 다원화된 21세기에서 국가개조론은 사회조직과 일반 시민을 개조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는 점에서 위험한 상상력이다. 세월호 참사가 안겨준 일차적 과제는 책임을 져야 할 정부 스스로의 혁신이지 타자화된 사회의 개조는 아닐 것이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두 가지다. 첫째, 지금 우리 사회에 요구되는 것은 정부-시장-시민사회 간의 새로운 제도적 디자인이다. 나는 그 거시적 방향이 ‘성장친화적 복지국가’가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둘째, 생명 및 인간적 가치를 우선시하는 새로운 공동체적 정체성과 시민의식의 형성이다. 개인의 자율성과 공동체적 연대가 생산적으로 공존하는 ‘연대적 개인주의’ 문화를 일궈가야 한다.
원근법이 서양 고유의 발명품은 아니다. <장자> 추수(秋水)편을 보면, ‘대지관어원근(大知觀於遠近)’이란 말이 나온다. 큰 지혜는 멀리서도 보고 가까이서도 봐야 한다는 뜻이다. 문제가 복잡할수록, 해법이 어려울수록 정부든 시민사회든 원근법적 상상력을 더욱 발휘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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