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염치를 생각한다

입력
2014.06.30 19:11
0 0

재수할 때 전국모의고사 1교시 국어시험을 치르는데 갑자기 시험감독을 하던 국어선생님이 “문제에 답이 없네”라며 혀를 차셨다. 찬바람이 나기 시작하던 때여서 교실에 있던 80여명의 재수생 모두 마음이 급했는지 대꾸하는 사람이 없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시험이 끝나고 나서 국어선생님에게 이유를 물었다. 사실 그는 재수생인 나의 담임선생님이기도 했다. 문제가 정확히 기억나진 않는데, 반대의 의미를 가진 접두어에 관한 문제였고 선생님이 어깃장을 놓은 문제는 ‘염치’(廉恥)라는 단어였다. 마찬가지로 선생님과 나눈 대화 전체가 생각나진 않는데, 선생님의 결론은 염치의 반대말은 ‘적반하장’(賊反荷杖)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내게 “네가 인생을 좀 살아보면 안다”고 말씀하셨고, 나는 친구들에게 이 얘기를 전하면서 어이없어 했던 것 같다.

최근 여의도 국회에선 인사청문회 제도를 두고 말들이 많다. 정확이 얘기하면 여권 인사들이 일제히 불만을 쏟아내고 있다. 안대희 전 대법관에 이어 문창극 전 중앙일보 주필까지 총리 후보자 두 사람이 연이어 청문회 문턱도 밟아보지 못하는 헌정사상 초유의 일이 발생했으니 여권 전체가 그야말로 ‘멘붕’ 상태일 것임을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다. “지금대로라면 예수님도 통과하지 못할 것”이라는 얘기까지 나올 정도였으니 말이다.

게다가 청와대나 새누리당 입장에서 보면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 후보자(논문 표절 및 제자 연구성과 가로채기 등), 안전행정부 장관 후보자(군복무 특혜 등), 문화관광체육부 장관 후보자(음주운전 등),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후보자(단기간 예금총액 급증 등), 국정원장 후보자(‘차떼기’ 연루 등) 등을 향해 숱한 의혹들이 제기되는 상황이 참으로 난감할 것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 ‘국가 대개조’에 나서겠다며 호기롭게 구성한 2기 내각이 자칫하면 출항도 못할 형편이니 말이다.

그래서 내놓은 해법이 청문회 제도 손질인 모양이다. 너무 수준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다 보니, '신상털기' 식으로 파헤치다 보니, 침소봉대해서 여론재판 식으로 가다 보니…. 결과적으로 국정 수행 능력을 갖고 있는 훌륭한 후보자들이 우수수 나가떨어진 것 아니냐는 항변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60일 전에 사의를 수용해놓고도 정홍원 총리를 유임시킨 건, 보기에 따라선 “지금의 청문제도라면 시킬 사람이 더 이상 없다”는 항변의 결정판이다.

물론 지금의 인사청문회 제도가 완벽은 고사하고 신상털기식이고 망신주기식이고 여론재판식인 측면이 있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인사청문제도가 일정한 문제점을 갖고 있다는 것이 곧바로 아무나 총리를 하고 아무나 장관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을 정당화하는 건 결코 아니다. 인사청문요청안이 국회에 제출되기도 전에 몇몇 기자들이 조금만 눈 여겨 살펴보면 집어낼 수 있었던 문제점들을 청와대가 사전에 걸러내지 못했다는 건 어떤 이유로도 용인될 수 없는 일이다.

당연히 청와대와 새누리당은 인사청문제도를 탓하기에 앞서 대국민 사과부터 했어야 옳았다. 지금 여권의 행태는 그냥 쓱 봐도 문제가 많은 인사들을 총리ㆍ장관 후보로 내놓고선 문제를 지적하는 이들을 향해 “털어서 먼지 안내는 사람 어디 있느냐”고 도리어 역정을 내는 꼴이다. 재수할 때 담임선생님이 염치의 반대말이 적반하장이라고, 나이 들면 알 거라고 했던 얘기를 곰곰이 다시 생각해본다.

새누리당이 7ㆍ14 전당대회와 7ㆍ30 재보선을 앞두고 또다시 “머리부터 발끝까지 혁신하겠다”면서 ‘새누리를 바꾸는 혁신위원회’(새바위)를 발족시킨 것도 큰 틀에서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다. 중책을 맡은 29살의 이준석 혁신위원장의 정치적 역량이 어느 정도일지는 지켜봐야겠지만, 잇따른 인사 실패에 대한 반성과 사과 없이 청문제도부터 탓하는 청와대와 친박계 지도부가 건재한 상황이다.

혹시라도 2012년 총선ㆍ대선 패배에 대한 우려가 큰 상황에서 결국 역전승을 일궈낸 ‘박근혜 비대위’를 벤치마킹한 것이라면 이 역시 참으로 염치없는 일이다. 당시 기라성 같은 외부인사들을 앞세워 약속했던 경제민주화와 보편적 복지는 지금 사라졌다. 여기엔 이준석 위원장도 적잖은 책임이 있다. 먼저 반성과 사과부터 해야 한다. 이게 빠진 혁신은 ‘선거용 이벤트’에 불과하다.

정치부 기자를 10년 넘게 하면서 자꾸 ‘염치’를 생각해야 할 일이 많아졌다.

정치부 양정대 기자
정치부 양정대 기자

torch@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