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예보 총성 100주년… 격전지 아프레스 추모행사
28개국 지도자 참석 사라예보엔 민족주의 앙금
영국과 프랑스, 독일 등 유럽연합(EU) 28개국 지도자들이 26일 벨기에 서부 이프레스를 방문했다. 제1차 대전 발발의 직접적 원인이 된 사라예보 암살 사건 100주년 기념일을 이틀 앞두고 전쟁 당사국 정상들이 격전지를 찾아 추모행사를 가진 것이다. 이들은 한때 기관총과 야포, 독가스로 서로를 살육했던 격전지를 찾아 유럽 대륙, 더 나아가 세계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할 것을 다짐했다.
AP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EU 지도자들은 이날 이프레스 도착 직후 추모 나팔 소리에 맞춰 메냉 게이트로 이동했다. 메냉 게이트는 제1차 대전 당시 이 곳에서 숨진 25만 명의 영국군 등 연합군 가운데 시신을 찾지 못한 이들을 추모하기 위해 이프레스 중심도로에 세운 거대한 석조문이다. 이 곳에서는 건립 이듬해인 1928년부터 오후 8시면 전쟁 당시 영국군 병영에서 불던 일과 종료 나팔 의식을 하루도 빠짐없이 재연하고 있다.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는 추모식 연설에서 “국가에 봉사한 사람들을, 그들이 왜 싸웠는지를 기억해야 하며 현재 누리고 있는 평화가 날마다 잊지 말아야 할 소중한 것이라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했다.
행사에서 가장 눈길을 끈 이는 패전국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였다. 그는 EU 지도자들 가운데 유일하게 의전을 깨고 행사장 주변 군중에 다가가 악수하며 “우리를 맞아줘 감사하다”고 말했다. AP통신은 “군중이 메르켈 총리의 도착을 환호로 맞이한 것은 민족주의 광풍이 지나간 이후 유럽이 얼마나 변모했는지 보여주는 한 단면”이라고 전했다.
제1차 대전은 1914년 6월 28일 당시 세르비아의 사라예보에서 10대 세르비아 청년이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를 암살한 것이 발단이 됐다. 오스트리아는 책임을 물어 세르비아에 반오스트리아 성향 관리 파면, 청년 재판에 개입 등 굴욕적인 조건을 제시했으나 세르비아가 거부했고, 결국 오스트리아는 그 해 7월 28일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전쟁은 이후 범슬라브주의를 내세운 러시아가 세르비아를 돕기 위해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를 하고, 오스트리아 동맹국인 독일도 러시아와 프랑스 등에 선전포고하며 확대됐다. 결국 연합국(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과 동맹국(독일 오스트리아 오스만제국) 등 31개국이 참여하는 최초의 세계 전쟁이 됐다.
제1차 대전은 4년 4개월간 1,000만명의 전사자와 최소 700만명의 부상자, 800만명의 실종자 등 막대한 인명피해를 초래했다. 또 경제가 파탄한 영국 프랑스 독일 등 기존 강국을 제치고 미국이 발돋움하는 계기가 됐다. 엄청난 배상금을 내도록 한 베르사유 조약에 불만을 품은 독일에서는 나치 출현을 부추기기도 했다.
전쟁이 끝나고 100년이 지났지만 이 때문에 생겨난 민족주의의 앙금이 여전한 곳도 있다. 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수도 사라예보에서는 보스니아계와 세르비아계가 28일 제1차 대전 100주년 행사를 따로 준비하는 등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세르비아계는 보스니아계가 100주년 행사를 독식해 제1차 대전 발발 책임 등을 자신들에게 돌리려 한다고 비판하고 있다. “두 차례 세계 대전을 촉발한 민족주의적 긴장은 최근 분리독립을 둘러싼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간 갈등처럼 세계 곳곳에서 지금도 나타나고 있다”고 AP통신은 전했다. EU 지도자들이 이프레스 추모식을 마치고 27일 브뤼셀로 옮겨 우크라이나 사태를 포함한 의제를 본격적으로 논의한 것도 이 때문이다.
전쟁의 아픔을 기억해 같은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으려는 민간의 움직임도 활발하다. BBC에 따르면 28일 사라예보 시청에서는 오스트리아의 세계적인 교향악단인 빈필하모닉오케스트라 콘서트가 열린다. 올해로 101회를 맞는 세계 최대 사이클대회 ‘투르 드 프랑스’도 오는 7월 5~27일 대회 코스를 1차 세계대전 격전지를 중심으로 정했다.
이태무기자 abcdef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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