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8~17층 건물 8개로 서울 첫 주상복합빌딩 탄생
1970년대 중반까지 '도시의 상징'
이후 용산에 상인들 대거 빼앗기고 인터넷 거래 활성화 탓 재기 못해
1970, 80년대 서울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세운상가를 모를 리 없다. 세운상가란 아마도 누군가에겐‘빨간책’으로 통칭되는 서적들이 은밀하게 거래되던 곳으로, 또 누군가에겐 시시한 전자부품들이 몇 차례의 납땜을 거쳐 무전기나 라디오 따위로 태어나던 곳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탱크 빼고는 다 만든다”는 말이 심심치 않게 통했을 만큼, 한때 그곳엔 말 그대로 없는 것 빼고는 다 있었다.
하지만 그런 단편적인 추억들로 세운상가를 정의하는 건 퍽 섭섭한 일이다. 서울의 한복판에서 최초의 주상복합건물로 태어나 국내 유일 종합 가전제품 상가로 전성기를 누리다가 도심 속 흉물이 되기까지. 제 키보다 높은 건물들이 우후죽순 생겨나는 동안 세운상가는 올해로 46년째 그 자리를 지켜 왔다.
굴곡진 세운상가의 생애, 그 뿌리를 찾으면 1940년대로 거슬러 올라 간다. 1945년 3월, 일제는 종로에서 필동까지 폭 50m, 길이 860m 직사각형 모양의 땅을 ‘전시 소개공지대’(전쟁 중 발생한 화재가 주변으로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비워놓는 공간)로 고시했다. 훗날 세운상가의 전신이 될 이곳은 기존 건축물의 철거 작업 중 해방을 맞는다.
주인 없는 땅은 이후 6ㆍ25전쟁을 거치면서 무허가 판자촌으로 채워졌다. 그러다 이 곳이 일대 격변을 맞게 된 건 1966년, 당시 제 14대 서울시장으로 취임한 ‘근대화 불도저’ 김현옥이 대대적인 정비를 추진하면서다. 김 전 시장은 윤락업소가 즐비하던 종로 판자촌 일대를 재개발해 도시의 상징으로 만들고자 했고, 천재 건축가로 불리던 김수근에게 그 설계를 맡겼다.
그리하여 그 해 9월 착공, 이듬해인 1967년 현대아파트 상가와 아세아상가가 잇달아 들어섰다. 그리고 1968년 마침내 대림 청계 삼풍 풍전 신성 진양 등 8~17층짜리 건물 8개로 이뤄진 세운상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1층에서 4층은 상가, 5층 이상은 주거공간이었고 지하에는 주차장, 지상에는 무려 엘리베이터가 설치됐다. 김 전 시장은 여기에‘세상의 기운이 다 모인다’라는 뜻을 담아 ‘세운’이라고 이름 붙였다.
세운상가는 이름처럼 승승장구해 1970년대 중반까지 도시의 상징으로 자리잡아 갔다. 신축 때부터 유일의 종합 가전제품 상가로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고, 연예인·고위공직자·대학교수 등이 앞다퉈 주거시설에 입주했다.
월남전에 파병됐던 군인들이 들여온 녹음기나 카세트, 카메라 등 전자제품이 활발하게 거래됐다. 이전에는 없던 물건들을 수리하기 위해 부품이 새롭게 만들어지기도 했다. 최신 문물이 거래되면서 서울은 물론 지방에서까지 찾아온 손님들로 상가는 항시 북적댔다. 그 시기 상가 분양광고에 쓰였던 ‘주부의 피로를 덜도록 설계된 부엌’이란 문구는 이후 국내 아파트 광고의 원조가 되기도 했다.
1970년대 후반부터 강남이 개발되고 서울 곳곳에 새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세운상가는 주거시설로서의 매력을 차츰 잃어갔다. 하지만 1980년대 개인용 컴퓨터의 보급 확산에 따라 상가는 더욱 번성, 3,000여개 업체와 2만여명의 고용인구가 살아 숨쉬는 종합 전자상가로 세를 넓혔다. 컴퓨터와 소프트웨어 대부분이 이곳에서 거래됐고, 상가 주변에는 전기·전자부품점과 조명용품점들이 자리 잡았다.
1985년부터 컴퓨터 판매점을 운영 중인 전창수(49)씨는 “그때만 해도 애플 등 외국산 컴퓨터를 취급하는 곳은 세운상가가 전국에서 유일했다”며 “컴퓨터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와봐야 할 곳으로 여겨져 밀려드는 손님에 밥 먹을 새도 없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코맥스와 TG삼보컴퓨터, 한글과컴퓨터 등 굵직굵직한 정보통신(IT) 기업이 이곳을 기반으로 성장했다. 현대 건축의 선봉장인 네덜란드 건축가 렘 콜하스는 당시 서울을 처음 방문했을 때 가장 인상 깊었던 건축물로 세운상가를 꼽았다. 자칭타칭 한국 산업화의 상징, 세운상가 위상의 반영이었다.
1987년 들어 정부는 용산역 서부에 청과물 시장을 가락동 농수산물도매시장으로 옮기고 그 자리에 세운상가 상점들을 이전시키는 계획을 수립했다. 그리고 그 해 7월 1일 ‘용산전자상가’가 태어났다.
새롭게 떠오른 용산으로 상인들이 대거 이동하면서 세운상가는 빠르게 지기 시작했다. 가게는 줄줄이 비고 찾는 사람들은 가파르게 줄어 1990년대 초반에는 부품을 구하려는 전자공학도와 몇몇 단골 손님들만이 왕왕 오갈 뿐이었다. 전씨는 “상점들이 용산으로 대거 빠진 뒤에도 상가 상황이 아주 나쁘지는 않았다”면서 “2000년대 이후 인터넷 거래가 확산됨에 따라 적자를 보면서 운영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고 말했다.
발길 끊긴 세운상가의 재기를 위해 서울시에서도 잇따라 내놨지만 번번히 실행에 옮겨지지는 못했다.
이서희기자 shlee@hk.co.kr
박소희 인턴기자(건국대 경영학과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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