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용서를 구하지 말라, 당신들과 함께 행복했노라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용서를 구하지 말라, 당신들과 함께 행복했노라

입력
2014.06.27 15:46
0 0

축구평론가 정윤수의 한국-벨기에전 관전평

조별리그가 끝났다. 브라질 아르헨티나 독일 네덜란드 코스타리카 등 열혈강호들의 용쟁호투가 남았지만 우리의 월드컵은 끝난 듯 보인다. 이른바 ‘국뽕’(과열된 애국심)으로 월드컵 대목을 노려온 방송의 조잡한 마케팅과 요란한 예능 프로들이 잦아드는 분위기니, 그나마 다행이랄까.

하지만 후폭풍이 간단치 않다. 홍명보 감독을 비롯하여 박주영 이청용 기성용 정성룡 같은 선수들이 호된 질책을 받고 있다. 지난 해 말 대진표가 확정되었을 때 여러 방송과 신문이 어떤 기사를 흩뿌렸던가. “행운의 H조” “최상의 조추첨, 알제리를 제물로” “역대 최상의 조, 16강 가능”….

그런데 이제는 칼을 들고 무를 자를 기세다.

이영표 해설위원의 애정 어린 비판과 홍 감독의 침통한 격려를 보자. 홍 감독은 벨기에전 종료 후 “2018년 러시아 월드컵대회를 위해 좋은 경험이 됐을 것”이라고 했다. 이에 이영표 해설위원은 “월드컵은 경험하러 나오는 자리가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글쎄, 이 두 발언이 공존할 수 없을까. 설마 홍감독이 젊은 선수들 경험 쌓게 하려고 발탁 했겠는가. 졸전 끝에 연거푸 패했지만 그래도 한국 축구의 미래를 위한 쓰디쓴 약이 될 거라는 패장의 마지막 발언이다. 이를 낚아채서 비난을 퍼붓는 것은, 잔인하다.

2014 브라질 월드컵 조별리그 H조 3차전 한국과의 벨기에의 경기가 열린 27일 오전(한국시간) 브라질 상파울루 코린치앙스 경기장에서 16강 진출에 실패한 홍명보 감독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 손흥민을 안아주고 있다. 이날 경기는 한국이 1대0으로 패했다. 연합뉴스
2014 브라질 월드컵 조별리그 H조 3차전 한국과의 벨기에의 경기가 열린 27일 오전(한국시간) 브라질 상파울루 코린치앙스 경기장에서 16강 진출에 실패한 홍명보 감독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 손흥민을 안아주고 있다. 이날 경기는 한국이 1대0으로 패했다. 연합뉴스

우리 모두가 부족했고 우리 모두가 오만했다. 아프리카에 대한 편견은 도를 넘었다. 자책골을 넣은 동료를 일으켜 세우며 얼굴을 마주보며 격려했던 가나 선수들, 의연하고 대범했던 코트디부아르 선수들, 그리고 카메룬의 사무엘 에토 선수를 기억하자. 크로아티아에 4-0으로 참패한 다음 날, 호텔을 나와 버스로 향하던 에토는 자기 이름을 부르는 소년을 발견한다. 열 살 소년 페드로는 에토를 보기 위해 브라질까지 와서 아침 일찍부터 기다렸다. 에토는 소년에게 다가가 부둥켜 안는다. 그리고 30초 가량이 흐른다. 누군가를 30초 가까이 감싸 안는다는 것은 자식과도 하기 어렵고 부부지간에는 어림도 없다. 만약 이 셋 중 하나가 알제리 대신 우리와 맞붙었다면 우리는 어김없이 ‘아프리카는 자중지란에 빠진다’는 식의 편견으로 비판했을 것이다. 자중지란? 생각해 보니, 그게 우리 자화상이었다. 조광래, 최강희, 홍명보로 이어지는 경질 파문에 해외파와 국내파 대립 등. 그 숱한 파문을 언론이 부풀리지 않았던가. 이제는 홍명보와 박주영이라는 희생양을 향해 ‘맥빠진 국뽕’과 ‘저조한 마케팅’의 화풀이를 해대는 중이다.

홍감독이 자인했듯이 명백한 전술 실패다. 극강의 수비진이 중원에서부터 압박하여 일체의 주저함도 없이 신속하게 상대 문전에 도달하는 전진 압박 축구가 이번 대회를 압도했다. 알제리도 그랬고 벨기에도 그랬다. 이에 대한 준비가 허술했다. 감독 책임이다.

27일 오전(한국시간) 상파울루 코린치앙스 경기장에서 열린 2014 브라질 월드컵 조별리그 H조 3차전 한국 대 벨기에 경기. 벨기에의 얀 페르통언에게 결승골을 내줘 0대1로 패한 축구대표팀의 박주영이 그라운드에 누워 눈물을 흘리는 수비수 김영권을 위로하고 있다. 연합뉴스
27일 오전(한국시간) 상파울루 코린치앙스 경기장에서 열린 2014 브라질 월드컵 조별리그 H조 3차전 한국 대 벨기에 경기. 벨기에의 얀 페르통언에게 결승골을 내줘 0대1로 패한 축구대표팀의 박주영이 그라운드에 누워 눈물을 흘리는 수비수 김영권을 위로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번 대회에서 스페인은 네덜란드에 1-5로 대패해 짐을 쌌다. 그러나 스페인 언론은 ‘용서를 구하지 말라. 당신들과 함께 행복했노라’라고 썼다. 잉글랜드도 월드컵 출전 역사 56년 만에 단 1승도 없이 짐을 쌌다. 그러나 팬들은 열렬히 박수했다. 로이 호지슨 감독은 영원한 주장 스티븐 제라드가 생의 마지막 월드컵을 뛸 수 있도록 최종전 후반에 투입했다. 우리 또한 선수들과 더불어 행복하지 않았던가. 2002년 한ㆍ일월드컵의 홍명보, 2012년런던올림픽의 박주영 그리고 수많은 선수들이 아름다운 경기를 했고 첫 경기 러시아전에서는 대등하게 싸웠다. 그런데 고작 두 경기만으로 모든 사랑과 추억을 내동댕이친단 말인가. 홍명보를 국가 영웅 취급하던 그 기세는 오직 ‘국뽕’이자 ‘시청률’의 호재였을 뿐이었단 말인가.

축구평론가 정윤수
축구평론가 정윤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