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화, 노후, 여생이라는 말들이 이제는 일상적 용어가 되어버린 것 같다. 평균수명을 계산해보니 생업에서 은퇴를 하고 나서도 20년 이상의 시간이 막연하게 주어지는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나도 벌써부터 10년 후, 20년 후 나의 삶이 궁금하고, 어떻게 꾸려갈 것인지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출근길에 나는 3호선 안국역에서 내려 인사동의 조밀한 골목길을 거쳐 회사까지 온다. 그런데 인사동 골목 곳곳 후미진 곳에서 할아버지들이 삼삼오오 모여 소주와 막걸리 등을 마시는 걸 자주 목격한다. 아침 아홉 시도 안 된 이른 시간에 그냥 시멘트 바닥에 술병과 변변찮은 과자 부스러기를 올려놓고 술을 드시는 것이다. 싸고 독한 술기운으로 자신의 기울어지는 여생에 대한 감상을 재무장하고 오늘 하루도 버티자고 저러시는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면 마음이 씁쓸해진다. 어쩌면 저것이 나의 근미래인지도 모르니까. 한 사람의 인생의 경험이 가지는 영묘함의 크기는 측정이 불가능하지만 아무리 위대한 인생일지라도 필연적으로 자기모독을 작동시켜야 하는 어떤 순간이 있다. 공공행사장이나 강연장에서 사람들 앞에 서야 하는 순간의 나와 새벽 두 시 발정난 고양이들이 우는 초등학교 운동장 한복판에 홀로 서 있을 때의 나를 우리는 얼마나 자주 대면시키는가. 경험이 아집이나 오만의 기반이 되지 않고 성찰의 거름이 되길 기대하는 건 여전히 가능한 불가능인가 아니면 불가능한 가능인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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