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일부터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오작동 라이브러리’라는 제목의 기획 전시가 열리고 있다. 컴퓨터 용어에서 ‘라이브러리’는 자주 사용되는 프로그램의 부분들을 모아 놓은 것으로 다른 프로그램과의 연결을 위해 존재하며 언제든 이용할 수 있도록 구성돼 있다. 이렇게 루틴으로 정리된 라이브러리가 오작동을 일으키면 사용자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갖가지 시도를 하고 정보를 구하며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전시를 소개하는 글은 ‘오작동 라이브러리’에 대해 비약적인 정보화 과정에서 ‘오히려 선택이 어려워진 현상에 주목하며,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지식 환경을 묘사하고, 동시에 주체적 사유의 필요성을 꼬집는 이중적 의미를 지닌다’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관람객들에게 ‘위키피디아(Wikipedia)식의 무한한 링크로 연결된 작품들’을 일방적인 설명에 의존해서 따라가기 보다는 ‘스스로 해석하고 작동의 오류를 발견하며 기존에 알고 있던 것을 수정해나갈 것’을 권한다. 이런 의도의 일환으로 작품마다 워크숍을 통해 중학생들이 작성한 짧은 해설을 붙이고 오디오 가이드의 형태로도 제공하는 공을 들였다.
20세기 초 현대미술에 많은 영향을 끼친 프랑스의 작가 마르셀 뒤샹은 ‘예술 계수(Art Coefficient)’라는 개념을 전개했는데, 이는 작품이 좋고 나쁘다는 판단과는 무관한 미술의 특성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는 강연에서 예술가가 작품을 만드는 과정에는 표현하지 않았지만 의도하는 것과,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표현하는 것이 늘 양립하며 이렇게 벌어진 틈 사이에 관람자가 들어와 자신이 본 것을 말할 때 비로소 예술가의 창조적인 행위가 완성된다고 주장했다. 물론 뒤샹 이후로도 미술에서의 관객은 해석을 넘어 직접 작품에 참여하고 작가가 마련한 역동적인 구조 안에 다양하게 개입하면서 작품의 형태(Form)를 결정짓는 급진적인 위치로까지 나아가게 된다.
20세기 말에 와서는 많은 미술가들이 작품을 감상의 대상에서 사용가능하고 변화되는 유연한 형태로 만들기 위해 파티, 축제, 시위, 연설, 계약, 여행 등 인간관계의 영역을 참조하며 작품을 구상했다. 이것은 진폭은 다르지만, 상품화할 수 없는 것이 너무 쉽게 소멸할 운명에 처해지고, 사회의 주체들이 소비자로 전락해 보편적인 물화가 진행되는 공간에서 일상적인 관계야말로 가장 타격받기 쉬운 세태에 저항하는 실천적인 태도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참여작가인 사사(Sasa[44]), 권죽희, 김경호, 김실비, 김아영, 김황, 이천표, 이행준, 방&리는 이런 비판적 태도를 유지하면서 전시에서 관객의 직접적인 개입과 교류의 방식을 고안하기 보다는 자신만의 시각과 기준에서 수집한 정보에 질서를 부여하고 관객의 뇌 속에 침투하려는 쪽에 더 가까워 보인다. 각각 작가 개인의 활동정보로 이뤄진 데이터베이스, 백과사전, 미디어, 비디오 게임, 분류학, 인간 도서관, 모방과 반복, 버려진 필름, 투명한 서재 등을 단서로 위의 작가들이 펼쳐놓은 오묘하고, 때로는 난해한 지도는 관람객의 해석을 부르며 오작동의 작동을 기다린다.
그간 간간히 봐왔던 사사(Sasa[44]) 작가의 연례보고 연작(2006~2013)을 한 자리에서 살펴보면서 구분하기 힘든 그의 일상과 작업이 어떻게 서로에게 강제력을 행사했을지 역추적해보는 것도 재미있다. 전시 홍보 글을 구글 번역기를 통해 여러 나라 말로 번역하고, 이를 전시와 관련된 각종 인쇄물의 디자인에 이용한 신동혁, 신해옥 디자이너의 작업도 눈여겨볼 일이다.
어느덧 다른 종류의 오작동에서 비롯된 폐해들이 잇달았던 올해 상반기가 끝나간다. 예술에서의 오작동만큼은 생산의 주체인 작가조차 예상치 못한 방향을 제시하고, 기대하지 않은 뜻밖의 결과를 초래하는 적극적인 창작의 방법이 되곤 했다. 하지만 오작동의 무한한 가능성은 제발 다양한 창작의 영역에 양보하고, 각종 사회적 위험에 대한 사회적 안전망, 오류 없이 작동되어야 할 것들이 부디 제자리에서 작동되기를…
이정민 미술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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