봐주기 판결과 형평성 없는 들쭉날쭉한 양형 등으로 신뢰를 잃은 사법부는 정녕 국민들의 희망이 될 수는 없는가. 정의의 보루여야 할 사법부가 곧잘 도마에 오르는 이러한 시기에 조심스럽고도 단단한 목소리를 내는 판사가 있다. 인천지방법원 부장판사 문유석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말하기 위해’ 자기고백을 담은 책을 냈다.
‘판사유감’‘은 저자 문유석이 법관 게시판 등을 통해 지난 10여 년간 국민과 법정 가운데서 균형 있는 시각으로 써 온 글들을 엮은 책이다. 이 책의 1부는 저자가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재판을 통해 법과 사람 그리고 정의에 대한 생각을, 2부는 법원이라는 조직을 통해 깨달은 한국 사회의 단면들을 담고 있다.
법은 과연 정의로운가. 정말 법 앞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한가. 국민과 권력 관계에 대한 기본적인 전제를 끊임없이 의심하게 되는 지금, 인간에 대한 신뢰를 담은 그의 따뜻한 시선이 냉소적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위로와 희망이 되어준다.
공업용 본드를 값싼 마약 삼아 흡입하는 청소년들을 위해 특정 업체에 찾아가 공업용 본드를 만들지도, 팔지도 말라고 영업을 방해하는 판사, 어쩌면 단 한 번도 어른에게 혼난 적 없는 일진들에게 안타까움과 애정 어린 호통을 치는 판사, 집단 폭행 후 자포자기한 삶을 살고 있던 소녀 절도범에게 ‘나는 세상에서 가장 멋진 사람이다’라는 구호를 복창시키는 판사… 이처럼 진심으로 사람을 대하는 판사들을 소개하면서 법정에 선 피고인에게 선입견을 가지고 판단한 이유로 직접 사과를 한 자신의 일화도 풀어 놓는다.
요즘 사회적 논란이 되고 있는 양형 문제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저자는 국민들의 분노와 엄벌 여론을 인민재판식으로 맹목적으로 추종해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경계하기만 할 일도 아니라고 말한다. 국민이 법관에게 부여한 양형의 재량에 대하여 최해 편차를 줄이는 노력도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그 재량을 두려워하여 선례와 기준으로 회피해도 안 될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사법 불신에 대해 억울해 만할 것이 아니라 국민들을 이해시키기 위한 노력이 더욱 필요하다고도 말한다.
그는 국민참여재판에 참여했던 경험을 통해 의미 있는 일화도 소개한다. 배심원들이 법관의 의견과 전혀 다른 중형을 주장하는 경우도 없었고, 오히려 예상보다 관대한 처벌을 주문하는 경우가 많았다. 배심원들에 따르면 언론보도가 아닌 피고인을 직접 보고 범행 동기와 전후 사정을 들을 때의 사정은 너무나 다르다는 것이다. 또한 연령이 높고 사회경험이 많을수록 관대한 의견을 내는 경우도 많았는데 그만큼 나이가 들수록 인간이라는 존재의 나약함과 실수 가능성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졌기 때문 아닌가 하고 저자는 생각한다.
저자는 판사 일을 하면서 최선을 다한다고 해도 오판으로 남의 인생을 망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남에게 폐 안 끼치고 살겠다는 자신감이 얼마나 헛된 망상이었는지, 책에서 본 추상적인 인간과 실제 세상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얼마나 다른지 깨닫게 되었다고 소회한다. 그래서 책의 제목인 ‘판사유감’은 판사에게도 어쩔 수 없이 인간으로서 느껴지는 감정이 있다는 의미의 ‘判事有感’과 이 사회가 판사에 대하여 느끼는 아쉬움과 불만을 잘 알기에 이를 고민하고 반성한다는 의미로써 ‘判事遺憾’이라는 두 가지 뜻을 지니고 있다는 설명이다.
문유석 지음, 21세기북스 펴냄, 1만4,000원.
김지곤기자 photo@hksp.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